정원식 前 국무총리, 남북회담 오찬장의 김 주석 인간적 따뜻함으로 대우
정원식 前 국무총리, 남북회담 오찬장의 김 주석 인간적 따뜻함으로 대우
  • 관리자
  • 승인 2007.03.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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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전 총리는 김일성 주석을 두 번 만났다. 한번은 오찬 모임이고 한번은 회담이었는데, 오찬장에서 김 주석이 인간적인 면에서 의표를 찔러오더라고 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직후 ‘정 총리. 재령이오, 사리원이오 ’ 하고 묻더라는 것.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사리원과 해주에서 학교를 다닌 정 총리로서는 김 주석의 정보가 상당히 정확한 데 놀라고 관심을 가져준 것이 또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면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점심 먹을 때 이북 사람들이 그렇지만, ‘이것 들어보시라요’라고 챙겨주고, ‘이건 선천강 상류에서 잡은 것이오’ ‘조개는 정력제라고 하지 않소’라면서 먹으라고 그래요.”


인간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에서 능숙하더라는 분석이다.


“어떤 부인이었는데 (김 주석) 발에 엎드려 ‘수령님!’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왜 그런가 했더니, 아이들 셋의 이름을 다 대는 거예요. 휘하에서 챙겼겠지만 아주 감격해서 눈물을 쏟아요.”


하지만 정 총리는 다른 면도 보았다.


“회담장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딴소리에요. 그래서 나도 정면으로 내받았지요.”


오찬장에서와 회담장에서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북측에 휘둘릴 수 있었지만 정 총리는 당당하게 회담에 임했다. 남북기본합의서도 우리가 많이 유리했다는 평가를 한다. 이 성과는 다음 정권인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카다피식 모델 권고’ 남북 화해하고 경제원조 받아 좋아

하지만 정 총리는 김영삼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때는 한발 물러나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단독으로 만나 주선했으니까요.”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이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에 고스란히 계승됐을까. 확실하지 않다. 정상회담이 불발로 그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 총리의 평가도 없다. 다만 국민의 정부 시절에 이루어진 6·15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기본합의서가) 기초가 됐겠지만… 잘못이라면 그걸 적용해야 하는데, 독자적인 합의서를 만든 것이에요.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낮은 단계로 연방제를 합의하다 보니 아마 그렇게 됐을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1991).


북한이 극도로 불리하던 때 나온 기본합의서와 체제 유지에 대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뒤에 나온 정상회담 합의문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 총리도 그 점은 지적했다. 적십자사 총재로 남북회담에 임하면서 보니 북한 측의 태도가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 때에 비해 ‘변질’돼 있더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처럼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도 별로 안 느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6자회담 시대인 지금, 정 총리는 북한에 대해 권고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리비아 카다피식 모델을 권하고 싶어요. 핵을 포기하고 남북과 화해하고 적대시하지 말고, 원조 받을 건 받고, 여러 나라와 교류하고 세계무대에 들어서야지. 저렇게 고립돼서는 오래 못가요. 간신히 연명이나 해서 뭘 하겠어요.”


대한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불우한 장애아동을 돕는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 때문일까. 북한 주민의 굶주림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았다.


“금년 춘궁기도 북한은 어렵다고 해요. 굶어죽는다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잘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 걸리고, 그러면 면역력이 떨어지니 질병에 걸리면 쉽게 죽어요.”


걱정하는 표정을 보니 아직도 적십자사 총재 시절의 마인드가 엿보인다. 정 총리가 적십자사 총재가 된 것은 문민정부의 말기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로 남북고위급 회담을 진두지휘하던 때 김영삼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거국내각 구성 얘기가 나오던 때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의 한마디로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던 것. 정 총리는 평양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적국에 가 있는 사람 뒤에서 총을 쏘는 격’이라고 여론이 비등하기도 했다.


정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이)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라며 “삼고초려를 했다고나 할까. 결국 그걸 맡아 두어 달 선거운동을 했지요”라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뒤 그는 정권인수위원장을 맡아 6공에서 문민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무난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문민정부에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여러 직을 제시했지만 극구 고사하다가 관직과는 별 연관성이 없는 세종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화합’을 화두로 정해 갈등 극복하는 것이 올해의 소망

 

물론 1995년에 김영삼 대통령의 청을 받고 서울시장이 될 뻔 하기도 했다. 시장 후보로 출마해 선거를 치렀으나 알려진 대로 조 순 후보에게 패함으로써 끝이었다. 그 선거 뒤 잠시 세종연구소에 복귀했다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아 자리를 옮겼다.

 

  적십자사 총재 시절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1998).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당시 적십자사 총재와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남북고위급 회담을 이끌었던 국무총리 시절의 경험이 있어 적십자사 총재로서는 적임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리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취한 국민의 정부와 호흡을 맞춰 민간부문에서 남북교류를 주도했다.


정 총리는 “그때는 북쪽 통로가 남양과 신의주 두 곳이었는데 쌀을 주지 않고 옥수수를 사서 들여보냈지요”라며 “나중에는 식량증산에 도움이 되는 비료를 지원했지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 총리만큼 북한과 관련하여 중차대한 역할을 두루 맡은 사람도 드물 것 같다. 올해 80세. 학자로 30여년을 후진 양성에 힘 쏟고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남북문제 업무를 수행했으니 누구보다 보람이 있는 삶을 살았다 하겠다.

 

지금도 복지재단을 맡아 보람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 또한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대학 졸업 후 가족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와 큰일을 한 것도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의 바람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남남 갈등, 계층간 갈등 그런 게 없었으면 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라 어렵겠지만 금년 화두를 화합으로 생각했으면 합니다. 화합이 되려면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워요. 예를 들어 지역에 대한 편견만 해도 그래요. 나는 이것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봐요.”


정 총리의 바람대로 대통령 선거가 갈등을 확대·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인 축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터뷰를 마치며 노년세대가 참고할만한 고언을 청해보았다. 정 총리는 “세븐 업(7UP)이라는 사이다가 있어요”라며 “거기 빗대서 노년세대가 7가지 면에서 향상(업:up)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세븐 업이란 깨끗이 하라(clean up), 의복을 세련되게 입어라(dress up), 즐겁게 살아라(chieer up), 모임에 빠지지 않고 자주 모습을 드러내라(show up), 얻어먹거나 신세지지 말고 돈을 써라(pay up·open up), 골고루 잘 먹어라(eat up), 욕심내지 말고 양보하거나 주라(give up) 등이다. 고령화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세대의 7가지 지혜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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