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팔이 소년에서 ‘하림각’ 오너가 되기까지
신문팔이 소년에서 ‘하림각’ 오너가 되기까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5.10.12 09:53
  • 호수 4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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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림각’ 옆에 있는 ‘구암 남상해 역사관’. 성공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하림각’은 대한민국 최대의 중국요리전문점이다. 9200평의 대지에 세워진 건물 4개 동의 수용인원은 3000여명이며 1500여대의 주차공간을 갖고 있다. ‘하림각’ 오른편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아담한 건물이 있다. ‘구암 남상해 역사관’이다. 남상해 종로구지회장이 걸어온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가족사진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이 앉았던 의자, 세계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받은 감사패와 기념품 등 선물, 100여개 기관·단체로부터 받은 위촉장·표창장·공로패·훈장 등이 3개 층의 벽면에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남 지회장은 “전시된 물품이 약 1000점 된다”며 “사람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새롭게 갖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한 소중한 자료실”이라고 밝혔다.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남 지회장의 어린 시절은 형제들이 굶어죽을 정도로 지독히 가난했다.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집안의 자손으로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하나도 없었다.
남 지회장은 “하루에 세 번 이상 근처 산에 올라 나무를 해와도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다. ‘서울에는 먹을 게 천지’라는 말을 듣고 열 살 때 무작정 상경해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했다”고 기억했다.
오전에는 신문을 돌리고 남은 신문을 팔았고, 오후에는 물지게를 졌다. 어느 해 12월, 하도 추워 잠에서 깼다. 어른들을 따라 창신동 낙산으로 가 빌린 삽으로 언 흙을 파고 겉에는 누비헝겊을 씌웠다. 안에는 산에서 주워온 나무껍데기와 마른풀을 깔았다. 연탄 화덕을 겨우 마련해 굴 바깥에다 피웠다. 그 작은 공간에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다.
어느 날 명동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돈을 지불한 후 주인에게 ‘일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주인이 ‘어려서 안 되겠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물지게를 져보였고 바로 채용됐다.
군에 다녀온 후 관광산업 육성의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관광공사에서 실시한 요리사 자격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1년간의 고되고 엄격한 실습을 거쳐 워커힐호텔 조리부장이 됐다.
첫 창업은 30세 되던 해였다. 그는 “명보극장 뒤편에 있는 11평 크기의 가게를 얻어 ‘동승루’라는 중국음식점을 창업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시장에 나가 식재료를 샀고 진심을 다한 서비스로 손님을 감동시켰다. 남산에 오픈한 ‘다리원’은 당시 김대중·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의 모임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명 고급음식점으로 인식됐다. 다양한 손님들과 인맥도 형성됐다. 이 음식점을 정리하고 ‘하림각’을 차린 게 1987년의 일이다.
“하림각에는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했던 요리사가 있었다. 다른 중국음식점에 있던 그를 스카우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그가 하림각을 와보고서야 승낙했다. 그는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음식을 조리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의 하림각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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