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미술 통해 위로받았으면…”
“많은 분들이 미술 통해 위로받았으면…”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7.08 14:06
  • 호수 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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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인터뷰

일본서 사업가로 성공… 재일동포 화가 도우려 작품 구입
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이 350점뿐임을 알고 충격… 기증 결심

일본 아키타현 출신인 하정웅(77․사진)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은 이우환의 작품 53점을 비롯해 지금까지 미술품과 역사 자료 1만여 점을 고국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들의 총 가치는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 명예관장은 왜 이렇게 많은 미술품을 아무 대가도 없이 기증한 것일까? 그에 대한 인터뷰는 이런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하 명예관장은 졸업만 하면 취직이 보장되는 지역 최고 명문고인 아키타공업고를 나왔다. 하지만 강제징용된 한국인 부모를 뒀다는 이유로 번번이 취직이 무산됐다. 또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미술을 배운다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다행히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면서 미술을 시작했지만 과로와 영양실조로 눈을 다쳐 끝내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전제품 판매업을 시작한 그는 큰돈을 벌게 된다. 돈을 벌자 그는 그림을 사들였다. 특히 형편이 어려웠던 재일동포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이며 지원했다. 이때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우환 화백과도 인연을 맺었다.
이런 하 명예관장이 대가없이 미술품을 기증한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1973년 처음으로 고국을 찾는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간 아버지의 성화 때문이었다. 전남 영암 출신인 하 명예관장의 부친은 ‘고향에 가고싶다’고 아들에게 보챘고 이를 빌미로 고국을 찾게 된 것이다.
이미 일본에선 유명 수집가로 통했던 그는 당시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이었던 덕수궁미술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 명예관장은 “당시 제가 수집한 게 700점이 넘었는데 국립미술관이 고작 350점밖에 소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영암을 가보니 월출산 등 자연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한일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한 왕인 박사와 저의 부모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부모는 못 먹고 못살았지만, 그 노동자의 아들이 문화로서 고향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마음의 빚이 있었고 그걸 갚고 싶었습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고국 국립미술관의 형편없는 미술작품 소장에 대해 알게 된 그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한글을 배웠고 고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미술품을 기증한 곳이 광주시립미술관이다. 1993년 갓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은 건물은 잘 지었지만 내부를 채울 미술품이 없었다. 하 명예관장은 “100평짜리 전시 공간을 채우려면 50점이 필요하다고 해서 1년간 4번의 전시회를 열라는 의미로 1차로 212점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는 현재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만 2500점이 넘는 미술품을 기증했다. 그의 기증행진은 계속됐다. 대전‧포항‧부산의 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숙명여대 등에 미술품을 기증했다. 부모의 고향인 영암에도 ‘샤갈의 판화’ 등 3700점을 내줬는데 이를 가지고 국내 최초로 개인기증 미술품으로 채워진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이 설립됐다.
하 명예관장은 “재일동포로 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때 이를 극복하게 해준 게 미술이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기증을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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