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때 창덕궁 비좁아 지어… 사도세자 뒤주 있던 곳
성종 때 창덕궁 비좁아 지어… 사도세자 뒤주 있던 곳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8.19 13:40
  • 호수 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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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궁궐을 가다 <3> 창경궁
▲ 창경궁은 4대 궁궐 중 가장 많은 수난을 당했다. 수차례 불에 탔고 일제 때는 전각이 헐려 동·식물원으로 사용되며 창경원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사진은 정전으로 사용됐던 창경궁 명정전의 모습.

여러 번 불타… 일제 때 동‧식물원으로 쓰이며 ‘창경원’으로 격하
명정전은 가장 오래된 궁궐 정전… 왕실 여인 살던 경춘전 눈길

지난해 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은 ‘사도’ 덕분에 사도세자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재조명 됐다. 하지만 영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도세자가 정확히 4대 궁궐 중 어디에서 뒤주에 갇혔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8월 12일, 사도세자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서울 중구 창경궁 문정전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35도를 넘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성종 14년인 1483년 창건된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했다. 하지만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걸 더 좋아했다. 결국 창덕궁의 공간이 비좁아졌고 성종은 왕실 웃어른인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보다 유독 수난을 많이 당했다. 임진왜란 때 전각이 모두 소실됐다가 재건됐고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가 났다. 순종 즉위 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궁 안의 전각이 헐리면서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됐다.
이후에도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함이라 주장했지만 우리 문화를 없애려는 정책이었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닦고, 궁 안에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나무 수천그루를 심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 1983년 7월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됐고 같은 해 12월 창경궁이란 이름을 되찾는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자 맨 먼저 ‘옥천교(玉川橋)’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남은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는 곳이다.
옥천교에서 여유를 잠시 만끽하고 명정문을 지나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지만,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됐다. 즉위식, 과거시험, 궁중 연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명정전 정 가운데에는 왕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는데 뒤편에는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담긴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한 쌍의 봉황(鳳凰)이 새겨져 있다. 봉황은 예로부터 상상의 동물로,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해서 새 중에 ‘가장 신령스러운 새’로 여겨졌다. 봉황은 고귀함과 존엄, 길조와 상서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명정전의 기둥은 원형 모양인데 선조들은 동그라미를 하늘, 네모를 땅이라 여겼다. 곧 왕이 있는 곳이 하늘임을 상징한다.
명정전의 좌편에는 왕의 집무실인 문정전이 위치해 있다. 앞서 밝혔듯이 1762년 정조(제22대 왕)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영조(제21대 왕)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지만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자신들을 싫어하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노론은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고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된다. 현재는 그때의 흔적은 살펴볼 수 없지만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도세자의 절규와 아버지를 풀어줄 것을 애원하는 어린 정조의 읍소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명정전 너머에는 왕과 왕세자가 기거했던 환경전이 있다. 이곳은 의녀 대장금이 중종(제11대 왕)을 치료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신들은 어의가 아닌 의녀가 임금의 주치의가 된 것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중종은 어의보다 대장금을 더 신뢰했고,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인조(제16대 왕)의 장남인 ‘소현세자’도 이곳을 사용했다.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간 소현세자는 9년 만에 돌아와 이곳 환경전에서 기거했지만 두 달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환경전 맞은편에는 왕실 여인들이 거주하던 경춘전이 자리한다. 이곳서 제일 먼저 생활했던 사람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다. 훗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인수대비)가 된다. 장희빈과 함께 사극의 단골 인물로 등장하는 인현왕후도 경춘전에서 거처했다. 혜경궁 홍씨도 남편인 사도세자가 죽는 비극을 겪은 뒤 경춘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경춘전은 여성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창경궁 내 연못인 춘당지는 원래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었다.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시범을 보이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던 곳이다.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며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풍년을 기원했고 이 같은 왕실의 모습을 보고 백성은 나라의 어버이로서 왕실을 섬긴 것으로 전해진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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