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반스, 이야기하는 인간
호모 파반스, 이야기하는 인간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
  • 승인 2016.09.02 11:22
  • 호수 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따스하고 건강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마치 추운 날 먹는 팥죽 같고, 더운 날 먹은 아이스크림처럼 가슴의 온도가 조절된다. 어린 시절이야 콩쥐가 있고, 심청이가 있어 우리의 가슴에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의 온도와 회복이라는 인간적 시력을 되돌려주곤 했다. 나이를 먹고 세상에 들어오는 소리는 흉흉하고 또 듣고 싶지 않은 고약한 소리도 많아졌다. 과거에야 할머니 입과 엄마의 수다가 모든 소식의 창구였으나, 수많은 미디어가 가득한 이곳은 거의 소리지옥이다.
요즘 들어본 소식들은 대부분 사건사고로 누가 누구를 죽였는데 매우 계획적이더라, 부모가 자식을 죽였더라, 성폭행과 무딘 법의 망치 이야기로 가득하다. 들은 것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움직이며 일상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옷을 짜낸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서로 고통을 주며, 심지어 처음 본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르고도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표정을 하고 TV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화면 다음에는 화면에 대한 사람들의 눈빛과 평가가 이어진다. 보이는 눈빛과 들리는 평가 이후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더욱 강화된다. 마치 공포영화 한편을 본 것처럼 우리는 후들후들 떨면서 심장을 쓸어내린다. 이제는 일부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번 희생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일상은 자체가 공포영화다.
‘콩쥐 팥쥐’는 그렇다 치고 ‘장화홍련’은 꽤 무서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들오들 떨면서 들어도 끝은 권선(勸善)이고 징악(懲惡)이 되고, 해피엔딩이 되는 스토리다. 21세기 일상의 공포는 권선도 아니고 징악도 아니며, 행복한 결과도 없다. 그저 ‘사건사고’이고 ‘뉴스’일 뿐이다. 물론 20세기에 잔혹사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드러난 것들이 좀 더 많을 뿐, 범죄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류는 19세기보다 20세기에 범죄가 더 줄었고, 20세기보다는 21세기에 더욱 범죄율이 줄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체가 많아 더 듣고, 미디어가 우리를 더 세게 흔들기에 좀 더 두려워하나 싶기도 하다.
문제는 모든 사회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도덕률이라는 게 있고, 대개 이런 도덕률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불안을 감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류와 함께 이어온 이야기 속에 면면히 녹아 사람들에게 구전과 민담으로, 동화와 노래로 이어져 민중의 마음속에 심겨진다. 그렇게 이야기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리를 통해 불안을 줄이고 도덕률로 가슴울타리를 치도록 한다.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 소리만 남은 시대를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인간은 늘 이야기 속에서 시작해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태어났다’라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고 ‘그렇게 죽었다’가 한 인간의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가며,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며 다음 세대를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파반스(Homo Farbans, 이야기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소리인가? 아니다. 이야기에서 소리는 그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런데 내용은 없고 그릇만 남은 것을 이야기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야기를 잃었다. 어느 시점인지 모르겠다. 할머니 소리가 끊기고 TV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인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몇 개 되지 않은 이야기에 비한다면 TV에는 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이 숨이 차도록 가득하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몇 개 되지 않는 뻔한 할매‧할배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거듭되어도 들리는데, 어째 그 정교하게 손질된 TV 이야기는 몇 분만 지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가 말이다. 참으로 놀랍고도 까무러칠 일이다. 정교한 것이 짧고, 엉성한 것이 길다. 적은 것이 길고, 많은 것이 짧다. 어떤 것이 이런 역설을 만들었는가?
소리만 남은 껍데기와 소리가 담는 이야기, 이 차이다. 할머니의 가장 뜨거운 입김이 있는 이야기, 할아버지의 뜨듯한 무릎 위에서 들은 이야기, 아버지의 팔베개를 하며 들은 이야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들었던 이야기에는 안정감, 위로, 긴장, 끌어안음, 붙잡음, 같이 소리 지르기가 있었고,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씩 들어도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는 신비한 전달의 힘이 있었다. 그저 소리가 아니라 따뜻함과 사랑이 담긴 이야기여서 다시금 듣고 싶게 하는 힘이 있었다.
팥쥐가 콩쥐가 되는 그날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 악이 선이 되고, 새드 스토리(슬픈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되도록 우리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서 고약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많이 들리면, 그땐 우리가 들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할 때가 온 것이다. 뉴스마저 고약한 요즘이 바로 그때이다. 우리가 콩쥐와 팥쥐를 다시 불러오자. 우리가 입을 열어야 아이들은 소리와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들어온다. 사랑을 찾아 들어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