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곡조 끝날 때마다 왜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고 왔던가 탄식이…
한 곡조 끝날 때마다 왜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고 왔던가 탄식이…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2.24 14:32
  • 호수 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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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24>

음악과 천재——세상에는 이것이 있을 뿐이다. 가장 위대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다. 거리보다도 항구보다도 집보다도 뜰보다도 나무보다도 별보다도 꽃보다도 지혜보다도 자기의 육체보다도 청춘보다도 사랑하는 단주보다도——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 음악이요 천재이다. 쇼팽이요 피아노요 그 소녀인 것이다. 이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계시된 듯 미란은 현혹한 느낌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한 곡조 한 곡조가 끝날 때마다 정신이 들면서 왜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고 왔던가, 왜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왔던가 하는 탄식이 나고 뒤를 이어 한 가닥 결의가 생기면서 새로운 힘이 솟는 것이었다…….
독주회가 끝났을 때 미란은 넋을 잃은 사람같이 자리를 일어서서는 사람 숲에 섞여 홀을 밀려나갔다. 문밖에 나서기가 바쁘게 현마의 소매를 끌고는 공회당 뒷문께로 향한 것은 천재소녀의 모양을 한 번 더 보자는 생각이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줄레줄레 몰려들었다. 천재란 대체 어디가 다르게 생겼을까. 어느 점이 뛰어난 것일까——하늘은 왜 유독 그에게 그런 특별히 선물을 보냈고 그는 무슨 인연과 값으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일까. 호기심이 안타깝게 불을 지른다. 이미 세상을 버린 백여 년 전의 쇼팽은 못 볼지언정 그를 흉내 내고 그를 본받으려고 하는 한 세기 후의 그 소녀만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문 앞에 한 대의 자동차가 와 닿더니 안에서 그인 듯한 사람이 나타났다. 미란은 밀리는 파도에 휩쓸려 발돋움을 하고 몸을 비비대며 고개를 질숙거렸으나 원체 첩첩으로 모여드는 인총으로 해서 문 앞은 가리어져 버렸다. 어깨 틈을 비집고 간신히 시선을 바로 돌렸을 때 어머니인 듯한 중년여인의 뒤를 따라 막 차에 오르는 소복한 소녀의 얼굴이 확적히 보여 왔다.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갸름한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모습이 분명하게 눈 속에 새겨진다. 천재라고 별다른 인상이 아니었다. 보통 모습에 새까만 눈망울이 차게 빛나는——그뿐이었다.
사람의 숲을 뚫고 차는 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어리석은 나귀들은 한 필의 준마를 보내면서 천치 같은 얼굴들을 지니고 줄레줄레 움직였다. 자기도 필연코 그 중의 한 사람일 것이기는 하나 미란은 그 천치 같은 얼굴들에 구역이 나고 염증이 나며 군중의 낯짝 하나하나에다가 침을 뱉고 발로 밟아서 까뭉개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어리석고 둔하고 추접스러운 군중의 꼴이 금시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그 감정은 곧 자기 경멸로도 변하면서 범상한 모습 속에 차게 빛나는 눈망울을 감춘 소녀의 자태가 역시 으뜸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마음속으로 모르는 결에 천재와 군중을 저울에 달아보고 어느 편이 더 중한 것일까, 천재란 군중이 있으므로 빛나는 것이나 군중은 천재가 없으면 빛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를 살리고 천만의 군중을 죽여야 할 것인가, 천만의 군중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천재를 희생함이 옳을 것인가 하는 주저가 온 뒤 역시 천만의 추물보다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것 천재 편에 마음이 기울어진다. 소녀의 인상이 가슴속에 더욱 또렷하게 새겨지면서 그의 자태가 자꾸 높아만 갔다.
현마의 손에 끌려 밝은 거리에 나와 등불을 우러러보았을 때 긴장과 속박이 풀리며 무거운 굴레를 벗어난 듯 몸이 가벼웠다. 거기에는 천재 아닌 수많은 남녀들이 그날 밤의 소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음악의 세상과는 동떨어져 편편스럽고 자유롭게 오고가는 것이다. 그 무심스런 자태들을 볼 때 미란은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천재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를 얽어매고 괴롭혔나를 느끼면서 겨우 안온한 세계로 풀려 온 듯 마음이 거뿐해졌다. 미란의 긴장되고 오물대던 자태를 처음부터 바라보고 왔던 현마도 기색이 풀리면서 이제는 편안한 세상 사람된 듯 비로소 인간의 회화를——조물주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회복하고 웃음도 나오고 농도 나왔다.
“천재의 맛이 어때. ——장하긴 해두 된 노릇이지.”
“되든 말든 될 수만 있다면 천재가 되지 범인이 되겠수.”
“조물주는 천재에게 재주를 준 대신 한편으로 괴롬을 주거든. 천재의 마음의 괴롬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천재만이 아는 것이겠지만——범인의 생활을 하는 편이 얼마나 수월하구 편편한지 이건 나두 알거든.”
“아저씨——.”
말은 듣는 둥 만 둥 문득 가로채면서 은근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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