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엄마와 그 엄마를 낳은 늙은 엄마
아이를 낳은 엄마와 그 엄마를 낳은 늙은 엄마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7.04.28 13:19
  • 호수 5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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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열어 두부를 꺼내서 먹기 좋게 썬 다음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올려 지지기 시작했다. 양념간장을 준비한 뒤 두부찌개를 올려놓고 샐러드드레싱까지 만들어 놓으니 대충 끝난 것 같다.
휴우. 이제 동이 트려나. 새 소리, 옅은 안개, 그리고 저 멀리부터 따뜻한 빛 한줄기가 밝게 비친다. 드디어 난 오늘 서울 간다. 장장 두 달간의 길고긴 미국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내 집으로 가는 것이다. 두 달 전, 난 할머니가 됐다. 작은 딸 해산을 위해 미국에 온 거다. 10년 전 큰 딸 결혼을 통해 할머니가 진즉에 될 수도 있었으나 무자식을 고집하는 큰 딸 때문에 뒤늦게 예쁜 손녀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선물은 선물이고 힘든 몸은 힘든 몸이다.
매 두 시간마다 젖 먹이고 트림시키고 빨래 돌리고 또다시 젖 먹이고 트림시키고 산모 미역국까지 끓여 먹이면 곧이어 산모 젖 마사지 시간. 이 과정에 수도 없이 아기를 들었다 놨다 반복한다.
할머니 나이가 되면 척추 병 한두 가지는 기본이다. 그래도 핏덩이 내 새끼만은 허리가 부러지건 말건 번쩍 올렸다 내렸다 한다. 가히 초인의 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서는 ‘뚜두둑’ 소리까지 난다. 물건은 들었다가 무거우면 금방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우는 아기는 그럴 수도 없고, 밤이면 밤마다 멍석말이 매타작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쑤셔댄다.
그러나 날 밝으면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해산을 하자마자 산모 몸에서 젖이 콸콸 나오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젖이 없으니 아무리 아기가 빨아도 젖 넘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열심히 빨아도 젖이 나오지 않으니 아기는 배가 고파 울고, 그래도 계속 젖을 물려야하는 아기엄마나, 그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아기엄마의 늙은 엄마나 모두 널브러진 시체가 된다.
세 여자가 지친 몸으로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 지금의 이 모습, 꽤나 친근하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엊그제 해산한 둘째딸이 이 세상에 나올 때였다. 친정엄마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를 산구완 해주러 오셨다. 그때도 이 난리였을 터인데 힘들었던 기억은 전혀 없고 두 달 있다 떠나가는 엄마를 붙잡고 펑펑 울었던 기억과 그 장면을 증명해주는 사진 한 장만이 지금은 덩그러니 남아있다.
돌아가신 내 친정 엄마는 힘든 이 산구완 일을 아무 내색도 안하시고 잘도 하셨다. 디스크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으셨지만 아기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시며 짜증은커녕 “내 새끼 오물거리는 입 좀 봐라. 웃는 것 좀 봐라.” 이런 말만 하셨을 뿐.
그랬던 엄마는 떠나가시기 전날 잊지 못할 이야기 한편을 남기고 가셨다. 아기가 깰까봐 조명도 어둡게 해놓고 모두들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고 소곤대던 그 밤. 헤어지기 섭섭해 한참을 울고 막 잠이 들었는데 아래층에서 뭔 소리가 났다. 깜깜한 구석에서 ‘또득 폭’ 요상한 소리가 난다.
남편을 깨웠다. “여보, 도둑 왔나봐.” 살그머니 옆에 놔둔 골프채를 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는 남편 뒤에 바짝 붙어서 내려가는데, 난 얼마나 무섭던지. 아래층에선 손전등 같은 불빛만 어렴풋이 보이고 그저 ‘또득 폭’ 소리만 반복돼 들렸다. 도둑이 무언가를 여는가 보다. 층계를 다 내려갈 때쯤 무슨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굽은 등이었다. “어머나.” 골프채를 든 사위를 본 엄마도 놀라긴 마찬가지. 이유인즉슨 이랬다. 엊그제였던가. 뭐가 먹고 싶냐 엄마가 묻기에, 무심코 ‘쑥개떡’이라고 말했다. 그게 맘에 걸리셨던지 나 모르게 밖에서 쑥을 뜯어다가(4월이라 뜰에 쑥이 꽤 있었다) 밀가루 넣고 반죽해서 쑥개떡을 만드시던 중이었다.
오랫동안 반죽을 치대야 쫄깃하다며 계속 반죽을 치대는 중에 ‘또득 폭’ 소리가 들렸던 것이고, 손전등 같은 불빛은 소켓에 꽂는 작은 취침용 등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도둑 사건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지만 우리는 두고두고 이 얘길 먹고 살았다.
그런데 미워하며 닮는다더니, 나도 떠나기 전 딸에게 물었다. “뭐 만들어 주고 갈까?” 두부조림이 생각난단다. 그래서 지금 난 쑥개떡이 아니라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그걸 만드는 중이다.
떠나기 전에 딸이 먹고 싶어 하는 걸 입에 꼭 넣어주고 싶은 건, 엄마나 그 엄마의 딸인 나나 한마음이었다.
먼 훗날 작은 딸의 딸이 해산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대를 이어 사랑하며 살게 될 게다. 그런데 사랑도 좋지만 걸레가 돼버린 이 몸은 어쩌나. 그럭저럭 잘 해냈지만 중간에 너무 힘들어 애를 안고 운적도 많았다. 그럴 때 문뜩 떠오른 생각. 그래, 해병대 훈련이라 생각하자. 이제 내일이면 두 달 간의 힘든 해병대 훈련을 마치고 서울로 간다. 물론 이 훈련 시간이 무척이나 그리울 게다. 하지만 훈련은 두 달로 충분하다.
여자가 예순 살이 넘으면 절대로 아이를 생산할 수없는 이유는 아이를 낳아도 키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아이는 아이를 낳은 엄마가 키워야 한다. 아이를 낳은 엄마를 낳은 늙은 엄마가 키우기에는 문제가 많다.
만든 반찬을 주섬주섬 통에 담은 뒤 부엌을 치우고 젖병도 닦고 애기 옷도 세탁기에 돌리고 아기엄마 먹일 돼지 족을 불에 올리고 환풍기를 틀었다. 이제 어서 내 자리로 돌아가자.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애를 키우기엔 내 인생이 그리 길지도 않고 적합한 체력도 아니다. ‘약은 약사에게, 아이는 아이 엄마에게.’ 오늘따라 샤워 물이 엄청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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