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들의 노예다
우리는 그들의 노예다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7.06.09 13:29
  • 호수 5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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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고성능 공기청정기가 한 대 있다. 꽃가루 알레르기 비염이 심해 큰 맘 먹고 산 것이다. 산 지 몇 년 후, 필터 교환 사인이 들어왔다. 다음날 당장 물건 산 곳으로 달려갔다. 걱정 말란다. 전화번호만 남기면 다 알아서 해준단다. 믿음이 갔다. 참 좋은 세상이다.
다음날, 전화가 왔고 약속대로 점검도 해주고 필터도 바꿔줬다. 사랑받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2년 후 또 필터 교환 사인이 들어와서 같은 방법으로 사람이 오고 바꿔주었다. 그리고 또 3년이 지난 엊그제. 이제는 인터넷 주문만 가능하단다. 씁쓸한 마음으로 번호 하나 달랑 받아 들고는 돌아왔다.
1588로 시작되는 번호. 상냥한 목소리로 위장돼 녹음된 정형화된 여자 목소리. ‘제품 문의는 1번, AS는 2번’ 듣는 걸 놓쳐 처음부터 다시 듣기를 서너 번. 한참만에 가까스로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냥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찌나 반갑던지.
조목조목 교환하는 법을 일러줬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인터넷을 통해 돈을 내고 택배를 통해 받고, 포장을 뜯고 기계를 열고 헌것을 빼내고 새것을 낀 다음 기계를 닫으면 끝. 아주 쉽단다. 못한다고 생떼를 부렸더니 그녀가 대신 주문해줬고 돈은 은행에 가서 무통장 입금했다.
며칠 후 포장을 뜯어보니 난감하더라. 설명서를 여러 번 읽었지만 뭔 말인지 도통. 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갈아 끼웠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기계가 사람대신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 있는 큰 건물 주차장들은 들어갈 때 나갈 때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다. 티켓을 뽑고 들어가서, 기계에다 티켓과 돈을 넣고 도장 받고, 나갈 때는 도장 받은 티켓을 구멍에 넣으면 문이 열린다.
어느 백화점에서의 일이다.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광장에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누가 치나 궁금해서 쳐다보니 사람도 없는데 건반이 저절로 움직인다. 예전에 본 어떤 유령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정확한 박자, 정확한 음, 정확한 볼륨까지. 완벽하다. 완벽해서 재미없다.
며칠 전에는 우승 상금 약 17억 원짜리 바둑대회에서 컴퓨터인 알파고가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커제를 3:0으로 꺾고 완승을 거두었다는 기사를 봤다. 컴퓨터가 돌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모조리 다 꿰고 상대방이 어디에 둘 지를 다 예상한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알파고는 바둑의 신에 가까웠다. 도무지 약점이 안 보였다”라는 그의 경기 소감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머지않아 병을 고치는 의술도 완벽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증상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컴퓨터에 입력시키면 그에 해당되는 문제점과 치료법까지 쏘옥 나올 것이다.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나오듯이 말이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통화보다 문자를 더 선호한다. 말을 주고받게 될 경우 감정, 목소리 톤, 주변 환경 등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났어도 문자로는 하트 뿅뿅도 보낼 수 있고, 말하기 힘든 것도 문자로는 훨씬 수월하고, 말 할 필요가 없으니 주변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음식도 인터넷으로 결제하고 주소 입력하면 금방 배달되고, 생필품 주문도 타자 몇 번 두드리면 다음날 후다닥 배달된다. 최첨단 컴퓨터. 고맙다. 하지만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아서 사람과 사람이 대화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좀 두렵다.
필터를 교체하며 “날씨가 좋네요”, “꽃이 예뻐요” 한두 마디 건네는 즐거움도 있었고, 주차장 티켓을 주고받으며 “아저씨 주차 공간 많아요?” 묻기도 하고 가끔은 “저 구석에 잠깐 세우세요”하는 우대도 받을 수 있었다.
완벽한 컴퓨터 연주보다는 연주자의 감정에 따라 다소 빨라지고 느려지고 움직이는 몸, 손가락, 숨소리까지 다 포함돼 완성되는 사람이 하는 연주가 살아있기 때문에 훨씬 더 아름답다. 손가락 하나로 생필품들이 줄줄이 집으로 배달되는 편리함도, 시식을 하면서 덤도 얻어오고 살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골라서 담아 사는 그 재미는 이길 수 없다.
사람들은 힘들게 일하고 외우고 분석하는 것이 귀찮아서 우리 대신 일해 줄 컴퓨터를 만들었다. 우리가 만든 그 컴퓨터. 바로 그들이 지금 우리로 하여금, 간단한 덧셈‧뺄셈도 계산할 줄 모르고 전화번호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우는 완전한 바보로 만들었고, 운전할 때마다 매번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차를 몰도록 해서 그들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곳을 갈 꿈도 못 꾸게 했으며, 우리끼리는 대화도 하지 못하게 유도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컴퓨터인 자기들만 의지하게 하고, 우리끼리는 말도 못하게 하여 점점 바보로 만든 다음, 결국 우리를 자기들의 노예로 만드는 건 아닌가. 어쩌면 이미 우리는 그들의 노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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