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는 멸시하는 미란의 표정을 알면서도 만족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단주는 멸시하는 미란의 표정을 알면서도 만족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9.01 13:32
  • 호수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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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51>

 

그런 때 공교롭게도 레코드에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악 「파세틱」이나 흘러나오면 가야의 표정의 반주인 듯 미란의 심사를 찬바람같이 설렁거려 놓고 휘저어 놓는다. 세상의 슬픔을 죄다 몰아다가 마지막 악장에다 으깨어 놓은 듯도 하다. 늦은 가을 그믐밤 스산한 바람이 불어 마지막 나뭇잎을 떨어트리는 속으로 낙엽과 함께 휩쓸려 밀려가는 정경 앞에는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에는 바다가 검다. 눈을 싸매고 그런 줄 알면서 절벽 위로 걸어갈 때의 슬픔, 죽음 한 걸음 전의 슬픔, 멸망으로 통하는 슬픔. 가야의 표정을 바라보며 「비창곡」을 듣노라면 미란의 마음은 멸망의 감정으로 젖어 버린다. 슬픔의 그 다음은 무엇일까. 미란은 차차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슬픔도 극에 달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슬픔도 극에 달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변하는 것인 듯하다. 아름다우리만큼 슬픔은 깨끗한 감정이다. 가야의 슬픔을 나중에는 한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 가면서 미란은 남의 슬픔을 울 밖에 서서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의 입장을 행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의 그날 밤 일이 있은 후 단주는 씻은 듯이 몸이 개운하면서 다음날부터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누웠던 때와는 달라서 거뿐하고 즐거우면서 투정을 부리고 꾀병을 하던 아이가 군것으로 달래임을 받고 무릎을 털고 일어난 격이었다. 태도가 다르면서 확실히 자기를 멸시하고 있는 미란의 표정을 알기는 하면서도 한편 역시 만족스런 마음을 금할 수는 없었다. 처음 한번 같이 중요한 한번이 없다. 실수이든 진정이든 간에 그 한번은 다음에 오는 열 번 백번보다도 중하고 값있는 것이다. 미란이 이제 와서 자기를 멸시하든 말든 간에 그 한번으로서 그의 비밀을 들쳐보았다는 듯 그의 전부를 차지해 보았다는 듯 흐붓하게 포화된 감정이 솟았다. 손수 탐험하고 점령한 깊은 처녀지에는 자기의 발자취를 남기고 자기의 깃발을 꽂으면 족한 것이지 뒤에 누가 이민을 하고 어느 자손이 와 살든 그것까지를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실에 첫 입자리를 넣으면 자기의 것임이 틀림없고 한번 받은 잔칫상은 다 먹든 말든 받은 사람의 차지이다. 단주의 만족과 자랑은 이런 정복의 쾌감에서 온 것이 사실이었다. 미란이 아무리 자기를 업신여기고 뽐내든 간에 다 헛것, 나는 너를 다 안다는 항의가 심중에 솟으면서 굽힐 것이 없이 마음이 까불었다. 그것이 있기 전의 우울하고 애닯던 심정과는 소양지판의 변화였다. 그런 꼴을 볼 때마다 미란은 실수를 했다는 뉘우침이 커지며 두 사람 사이에 은연중에 싸움은 삐지 않았다.
“무얼 믿구 그리 우쭐대.”
“세상에서 나보다 더 장한 사람이 있는 줄 아나. 한 나라의 왕두 나보다 더 장할까.”
“낯가죽이 두껍긴 해.”
“아무리 멸시해 보지. 이 자랑은 못 꺾거든.”
미란은 풀이 죽어지며 더 대들어야 소용이 없는 것이어서 침착하게 타이르려 든다.
“실수라는 것두 있거든. ――술이 취하면 개천에 발을 넣는 수두 있구 상기가 된 김에 뭇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수두 있겠구 그것이 다 진정이 아니구 정신이 사깔려서 생기는 일시의 허물이구 실수거든.”
“허물이거나 실수거나 된 다음엔 상관이 없거든. 허물이라구 뉘우친다구 개천에 빠진 발이 금시에 씻겨질까. 아무리 뉘우치구 반성해두 허물은 허물이거든.”
그의 말소리가 높아지는 데는 아찔하여서 미란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자기의 목소리가 도리어 고함으로 변한다.
“제발 더 말하지 말아요. 잊어버려요. 잊어버려 줘요.”
“죽어두 그것만이야 잊을까봐. 세상일 다 잊는대두 그 기쁨만이야 잊을까봐.”
“내게 조금이라두 관계되는 것은 말갛게 잊어버려 줘요.”
“남의 생명의 특권까지를 짓문지르려구.”
“싫어요. 생각만 해두. ――맘을 그물 속에다 잡아 넣으려구 못살게 구는 이 찰그마리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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