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전…아시아인 스스로 물어본 ‘아시아의 정체성’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전…아시아인 스스로 물어본 ‘아시아의 정체성’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4.30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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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8개국가 15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아시안들이 국가, 민족 등의 문제를 통해 아시아의 정체성을 살펴본다. 사진은 전시에 소개된 염지혜의 '미래열병'(Future Feve)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8개국가 15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아시안들이 국가, 민족 등의 문제를 통해 아시아의 정체성을 살펴본다. 사진은 전시에 소개된 염지혜의 '미래열병'(Future Feve)

필리핀의 살바투스 등 8개국 15명 참여… 국가·민족의 문제 담아

국기를 실타래로 표현한 ‘설명은 때로 상상을 제한한다Ⅱ’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할 때 흔히 ‘문(門)을 열었다’고 말한다. 다가올 미래가 황금빛일지 잿빛일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기 전에는 누구나 기대감에 부푼다.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도 거대한 ‘대문’ 하나가 관람객을 맞았다. 그런데 조금 독특했다. 문이 열려도 계속 또 다른 문이 나와 당혹감을 줬다. 그렇게 반복을 거듭했고 결국 설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바뀌었다. 서양이라는 대문에 가로막혀 변방으로 밀려났던 아시아 국가들처럼 말이다.  

아시아 작가들의 눈으로 아시아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열리고 있다. 화제의 전시는 오는 7월 8일까지 계속되는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전이다. 필리핀 출신 작가 마크 살바투스의 ‘대문’으로 시작되는 전시는 8개국 15명(팀) 작가들이 참여해 아시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담은 작품 21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1전시실에서는 국가·국경·민족·인종·정체성 등이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탄생된 ‘보이지 않는 위협’을 조명한다. 마크 살바투스를 비롯 요게쉬 바브, 염지혜, 후지이 히카루 작가가 아시아 국가에 만연한 차별과 구분, 긴장, 대립의 현장을 펼쳐 보인다.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게쉬 바브는 ‘설명은 때로 상상을 제한한다Ⅱ’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177개의 국기를 해체해 형형색색의 실타래가 바닥을 수놓고 있는 작품으로 국가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대한 시각을 담아냈다. 흰색 바탕에 푸른색 붉은색 실타래로 표현한 태극기가 인상적이다.

염지혜의 ‘미래열병’도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미래를 향한 사람들의 위기의식, 조급함, 열등감 등의 긴장상태가 과거에서부터 반복돼 왔음을 전제하고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된 미래주의 문화운동을 돌아본다. 미래를 위한 진보는 곧 첨단과학기술을 선점해야 가능한 것처럼 작품은 기술이란 전염병에 빠진 현대인들의 모습을 옮겼다.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사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영상에 딱 들어맞는 음악이 관람객들을 미래로 안내하는 동시에 무분별한 발달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티모테우스 A의 '쿠스노, 호랑이의 죽음과 다른 빈 자리'의 모습.
티모테우스 A의 '쿠스노, 호랑이의 죽음과 다른 빈 자리'의 모습.

일본작가 후지이 히카루의 실험도 빼놓을 수 없다. 후지이 히카루는 ‘일본인 연기하기’라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이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인 모습을 연기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과정에서 과연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의 행동방식과 언어, 태도가 현재에 사라진 것이 맞는지 고찰하면서 관람객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전하는 듯하다.

‘교차적 공간’을 주제로 삼은 두 번째 전시장에서는 안유리, 타오후이, 가마타 유스케, 엘리아 누비스타 등이 모든 사건이나 대상이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유리의 ‘불온한 별들’은 19세기 말, 한반도를 떠나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진 조선인들의 이주 역사 속에서 여전히 우리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조선족’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작가는 조선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작품 안에서 이주역사의 공통적 과제인 ‘고국과 모국 사이의 괴리감’ ‘동포와 외국인 사이에서 자리 잡기’ 등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국가와 민족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통과 현대에 대한 개념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대만 출신 장 쉬잔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소미’를 내놓았다. 그는 어릴 적 가족들과 종이로 제례품을 만들던 기억을 가져왔다. 장 쉬잔의 가족은 3대에 걸쳐 수십 년 간 장례용 종이공예 가업을 이어왔지만, 최근 많은 제례품들이 공장에서 제작되면서 기업은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이를 애니메이션 형식을 통해 장례 의식의 요소들을 부각시키면서 전통과 현대의 정의를 묻는다.

전시의 마지막은 관객 참여형 공간으로 꾸며졌다. 미디어 영상, 설치 작품뿐 아니라 각종 참여 프로그램으로 미술관 전체가 북적인다. 전시실 공간이 아닌 서울박스, 복도 등 미술관 공용공간에 5개 팀 작가들은 6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해 관람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끌어내는 무대로 만든다. 

이중 레몬 와인을 관람객에게 선사하는 황 포치의 작품을 눈여겨볼만하다. 대만 출신인 그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공장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작품 ‘생산라인’을 구성했다. 2012년 처음 시작된 프로젝트로 어머니와 중국의 한 봉제공장 여공의 이야기를 기록함과 동시에 지난 50년간 대만의 농업경제 변혁과 사회변화상을 담고 있다. 전시기간 동안에도 한국의 봉제공장 노동자의 이야기를 더해 작품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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