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의 시간을 버틴 꽃만 핀다
인고의 시간을 버틴 꽃만 핀다
  • 류성무 수필가
  • 승인 2018.06.15 11:43
  • 호수 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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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여름에 성큼 진입하면서 거리도 녹음(綠陰)으로 변해가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형색색의 꽃망울을 터트렸던 꽃은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는 푸른 잎들이 대신하고 있다. 걔 중에는 벚나무가 가장 눈에 띈다. 매년 4월마다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벚나무는 꽃이 지고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는다.  
매년 이런 말을 하지만 유독 이번에 봄꽃이 핀 시간이 짧았던 것 같다. 지난 4월 5일 직지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하려고 차에 올랐다. 매년 4월 초에는 늘 설렌다. 차를 타고 수많은 벚꽃이 만개한 길을 달리는 것은 노인에게도 설레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벚꽃은 보이지 않았고 물먹은 꽃잎과 가지들은 늘어져 산고를 겪은 산모처럼 힘없이 축 처진 자태였다. 간밤에 비가 와서 만개한 꽃이 이틀 정도는 빨리 졌다는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했던가. 이는 꽃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대표적인 봄꽃인 벚꽃, 목련,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등은 개화시기가 10일 전후로 짧다. 이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힘이나 세력 따위가 한번 성하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흔히 20대를 인생의 꽃으로 비유한다. 반면 노인과는 거리가 먼 단어이기도 하다. 외형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주름 하나 없는 젊은 사람이 노인보다 꽃에 더 가깝다. 하지만 꽃은 피고 지고 ‘또 핀다’.  
한 송이가 개화하기 전까지는 길고 긴 인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땅 밑에서 동면을 하며 모진 혹한 속에 생명을 유지하다 가까스로 피우기 때문에 그 색깔이 우아하고 영롱한 것이다. 벚꽃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 영양을 흡수하고 줄기가 잎을 길러서 가을에 잎을 보내고 언 땅에 맨몸으로 겨울을 버틴 끝에야 햇빛을 보게 된다. 
이는 노인의 삶과 더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쳐 이제 좀 살만해지나 싶은 순간 IMF 구제금융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다시 일어서긴 했지만 100세시대라는 또 다른 도전 앞에 서 있다. 
노인이라 해서 화려한 시기가 갔다는 건 편견이다. 오히려 나이를 먹고 봉사활동을 통해 더 찬란해지는 어르신들도 많다. 그 분들의 꽃은 이제 막 피었을 지도 모른다.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버티고 꽃망울을 터트린 벚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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