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그녀는 예뻤다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8.07.13 11:39
  • 호수 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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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친구의 딸이 남학생 제치고

강남서 총학생회장이 됐다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

앞으로 경로당이나 마을서도

할머니 리더들 많이 나왔으면

마치 걸그룹에서 노래 부르다가 TV에서 막 튀어나온 아이 같다. 조막(?)만한 얼굴에다 기다란 팔다리까지. 내 친구의 늦둥이 딸이다. 

그런데 엊그제 그녀가 강남의 청담동 한복판에 있는 모 고등학교의 전교총학생회장이 되었단다. 학생의 절반이 남자인데 남학생들을 제치고 여자가 최고 수장이 됐다는 얘기다.

청담동이라 하면 ‘내노라’하는 우리나라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사는 곳이 아니더냐. 

미인대회라면 또 모를까, 그곳에서 여자가 남자를 제치고 리더가 되었다니. 아마 나긋나긋 예쁘게만 보이던 그녀에게도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나 보다.

어쨌거나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70년도 말. 첫째 아이의 출산을 코앞에 둔 그때. 시아버님이 내게 간곡하게 주문하신 말씀이 있었다.

‘얘야, 며칠만 참아라. 나올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데 만약에 지금 딸을 낳으면 정말 큰일 난다. 백말 띠 여자애를 뭐에 쓰겠냐. 일주일만 지나면 양띠가 되니 며칠만 참고 견디어라.’

그때 뭘 어떻게 참고 견디어야 되는지 몰랐던 나는, 아버님의 바람을 져버리고는 그만 백말 띠 여자애를 낳고 말았다. 건강하고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집안 분위기는 매우 우울했다. 

그런데 태어난 띠가 사람의 성격을 좌우하긴 하는지, 그렇게 내 기를 죽이며 태어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그 딸은 지금 미국 모 대학에서 당당하게 선생 노릇하며 잘 살고 있다. 

두 번째도 어김없이 또 집안 어르신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며 둘째 딸을 낳았다.

딸 귀한 집의 고명딸이었던 나. 집안분위기 따라 ‘딸 낳은 죄인’처럼 겉으로는 우울한 척했지만, 딸 낳은 내가 왜 기 죽이며 살아야하는 건지 이해는 힘들었다.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는 옛말이 맞는가. 그 둘째 딸 덕에 우리부부는 지금 수시로 힘들게 미국을 드나들고 있는 중이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바뀐 것은 강산만이 아니다. ‘후남이, 끝순이,’처럼 다음 아이는 꼭 아들이기를 염원하며 갓 낳은 딸의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도 없고, 성별 테스트를 통해 딸이면 유산 시키는 사람도, 아들 낳을 때까지 무제한으로 애를 낳는 사람도, 딸만 낳았다고 소박맞는 사람도 없다.

선호도 조사에서도, 키울 때의 잔재미를 기대해서인지 딸이 아들보다 앞섰다고도 한다.

사실이지 아들딸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열심히(?) 낳아서 잘 키워 짝 맞춰주면 부모 할 일은 그만인걸. 

‘여성리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장 힘을 받아야 할 정치판에서는, 아직도 여자 수장이 보기 힘들다.  

앞으로 옆집 앞집 뒷집 모두들 백세를 넘기게 되는 그때가 되면, 노인들의 파워 또한 커질 텐데. 이왕이면 그때 ‘노인회관 마을회관 경로당’에서 여성리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 

그저 시어른 공경하듯 허드렛일이나 많이 하라고 시키는 ‘젊은 며느리 같은 이장님’ 말고, 마을이 잘 살기 위해 추진해야 할 정책이나 계획도 짜고,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없앨 것과 자를 것도 냉철하게 처리할 수 있는 그런 ‘할머니 이장님’ 말이다.

예전에. 아버지는 나귀타고 기생집 드나들던 그 옛 시절에. 한량 남편대신 여자 혼자서 힘든 논밭일 다 해가며 줄줄이 낳은 아이들과 시집식구들 다 먹이고 챙기고 씩씩하게 가정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의 할머니들. 그들에겐 나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제 슬슬 그런 할머니들이 나설 때가 되었다.

그나저나. ‘정X아. 모처럼 맡은 회장 노릇 잘 해내어라. 지나가는 길손의 외투를 벗기는 건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 아니더냐. 요즘은 너 같은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대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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