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총풍사건 연루 ‘흑금성’ 실화를 바탕으로 실감나는 연기
영화 ‘공작’, 총풍사건 연루 ‘흑금성’ 실화를 바탕으로 실감나는 연기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08.17 15:05
  • 호수 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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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첩보 활동하다 구속된 박채서 수기 바탕… 공작원 되는 과정 흥미로워

평양 순안국제공항 등 북한 실제 모습 재현… 총성 없는 스파이전 압권

극중 북 고위층 핵심간부 '리명운'을 연기한 이성민, '흑금성'이란 암호명을 가진 북파공작원 박석영으로 열연한 황정민, 북 보위부 '정무택' 역의 주지훈,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으로 분한 조진웅.(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극중 북 고위층 핵심간부 '리명운'을 연기한 이성민, '흑금성'이란 암호명을 가진 북파공작원 박석영으로 열연한 황정민, 북 보위부 '정무택' 역의 주지훈,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으로 분한 조진웅.(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007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첩보원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꾸준히 제작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가를 위해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는 진부할 법도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등 시리즈를 배출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충무로에서도 2000년대 이후 ‘간첩’을 내세운 작품들을 제작해 재미를 보고 있다. ‘의형제’, ‘은밀하게 위대하게’, ‘용의자’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북한이 남한으로 보낸 남파 간첩 이야기였다. 북파 공작부대를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1000만 영화 ‘실미도’는 미완으로 끝냈기에 북파공작원 영화로 분류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8월 8일 개봉한 ‘공작’은 한국영화 최초의 북파공작원 이야기라 불러도 무방하다.

작품의 내용은 이렀다. 1993년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정보사 소령 출신인 박석영(황정민 분)은 안기부에 스카우트된다. 그는 북한의 고정간첩 눈을 피하기 위해 안 먹던 술을 먹고, 도박을 한다. 그렇게 신분세탁을 한 그는 흑금성이란 암호명을 받는다. 

그에게 내려진 지령은 북의 고위층에 접근해 핵 개발 계획을 확인하라는 것. 그의 정체는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 분)과 안기부장, 대통령만 안다.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그는 베이징 주재 북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 분)에게 접근한다. 리명운은 박석영을 통해 북한에 필요한 돈을 구하려 한다. 그렇지만 보위부 정무택(주지훈 분) 부장은 박석영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마침내 리명운을 통해 대북 사업으로 북한을 배경으로 한 CF 촬영 허가를 얻어낸 박석영. 그는 리명운과 북의 최고위층 신임을 얻는다. 박석영은 CF 촬영 답사를 빌미로 북한의 이곳저곳을 탐지하며 핵 개발 실체를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1997년, 한국의 대선을 앞두고 남과 북의 수뇌부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진행된다. 조국에 대한 신념으로 움직이던 박석영은, 남과 북의 은밀한 거래로 인해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작품은 실제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한 실존 북파 공작원 박채서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박채서의 수기를 바탕으로 기자의 취재기를 녹여내 1, 2권으로 출간된 책 ‘공작’(김당 지음)에서 절반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 대북공작원 시절, 엘리트였던 박채서는 북한 정보기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진급과 인사에 불만을 품은 군 부적응자로 위장했다. 군 동료들에게 빌린 돈을 제때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됐고, 부동산 투자를 빌미로 각종 사기행위를 저질러 전과자가 됐다. 자신의 존재를 점점 지워나가면서 주변을 속인 그는 1995년 안기부 소속 국가공작원으로 채용됐다.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북한산 상품을 사들여 남한에 파는 대북사업가로 위장했다. 

베이징 루프트한자 센터에 위치한 캠핀스키 호텔(영화에선 밀레니엄 호텔)에서 북한 대외경제위 리철 처장을 만나 그의 신뢰를 얻었고, 평양에 들어가 김정일 북방위원장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 사업까지 성사시킨다. 

이번 작품은 흔히 생각하는 첩보 영화의 전형과 거리가 멀다. 영웅이나 다름없는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기예에 가까운 액션, 감탄을 자아내는 첨단 장비의 향연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총 한 발 제대로 쏘는 장면이 없다. 스파이를 총 든 히어로가 아닌 천의 얼굴을 지닌 연기자로 설정한 것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표정 하나하나에 판이 바뀌는, 고요하지만 치열한 수 싸움이 영화를 지배한다. 

또한 작품은 1990년대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실제 뉴스 화면과 함께 펼쳐놓아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안기부의 총풍사건을 비롯한 북풍공작,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1997년 대선, 남북 연예인의 합작 광고 촬영 등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을 내세운 안기부의 정치공작은 여러 사건을 연상케 해 분노를 자아낸다.

기존 남북 관계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가 보여준 풍경과 전혀 다른 북한의 모습도 볼거리다. 남북 정상회담 뉴스로만 접했던 평양 순안국제공항부터 하늘 위에서 바라본 대동강 전경,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광복거리, 흑금성이 탄 차의 창밖으로 넌지시 보이는 평양 시내, 평양 대성산에 있다는 주석궁까지 국내와 대만 등을 돌며 재현한 영화 속 평양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과 위압적이기까지 한 김정일의 별장 등이 주는 현실감은 놀라울 정도. 반대로 영화의 중반부 흑금성이 찾아가는 영변의 장마당은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이 쓰러져 있고, 몇몇 사람들이 산처럼 쌓인 시체를 뒤지는 세기말적 풍경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총칼이 난무하는 액션에 못지않게 말과 눈빛, 표정으로 몰입감을 높이는 황정민과 이성민을 비롯해 안정감 넘치는 연기력을 보인 조진웅, 북한 보위부 과장 역을 맡아 서늘함과 젊은 치기를 동시에 표현한 주지훈의 변신 역시 극에 흥미를 높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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