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시인과 기생의 사랑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시인과 기생의 사랑 / 이동순
  • 이동순 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3.07.03 11:44
  • 호수 8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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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백석과 사랑 불태웠던 김자야

조선권번 기생출신이었지만

만학의 열정, 시인 추모로 귀감

카이스트에 재산을 기부

본명을 딴 ‘김영한 홀’ 만들어져

김진향(金眞香, 1916~1999)은 서울 출생의 기생이다. 자야(子夜)란 이름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이 특별히 붙여준 애칭이다. 

백 시인은 1930년대 식민지조선 문단에서 천재적 활동을 펼쳤던 고결한 문학인이다. 두 사람은 20대 청춘 시절 함경도 함흥에서 만나 사랑의 꽃을 피웠다. 당시 백석 시인은 함흥의 명문 사학이었던 영생고보의 영어교사였고, 진향은 함흥권번 소속의 기생이었다. 

어느 날 학교 행사가 함흥권번에서 열렸는데 그때 만남으로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결국 연인관계로 맺어졌다. 둘은 함흥 시내의 다른 곳에 각각 방을 얻어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말이나 휴일에 늘 만나 시내 백화점 쇼핑도 하고, 바닷가를 거닐거나 눈 오는 함흥거리를 다정히 팔짱을 낀 채 걸어 다녔다. 

잠시라도 작별이 싫어서 눈이 펑펑 내리는 밤 두 사람의 숙소를 서로 바래다주며 밤을 샌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기어이 숙소를 한 군데로 합쳤고 짜릿한 동거생활로 돌입했다. 이런 모습이 당시 함흥에서 얼마나 눈총을 받고 큰 화제가 되었을 것인가. 두 사람의 사랑은 이후 3년 동안 불덩이처럼 활활 타올랐으며, 마치 숨바꼭질처럼 쫓고 쫓기는 불안한 관계로 이어지다가 결국 시인은 일제 말 만주로 혼자 떠나갔다. 

둘 사이에는 분단이라는 깊은 장벽이 가로막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험한 세월의 파란 속에 시인은 만주 생활을 접고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와 살다가 한때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가 됐다. 잠시 김일성대학 영문과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북에서 시인으로 여러 편의 시와 아동문학평론 따위를 발표했으나 북한 문단의 주류적 성향과 늘 배치되는 흐름으로 그들의 눈 밖으로 크게 벗어났다. 시인의 고립적 삶은 마침내 평양에서 추방되어 압록강 가까운 자강도의 해발 800미터 산중턱의 목장 양치기로 가족들과 함께 멀리 쫓겨났다. 고결한 시인이 목장 관리자가 되어 국경지역 찬바람을 견디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가족들은 시인의 시와 문학이 미웠으리라. 아버지가 시를 쓰면 아들이 그 원고를 몰래 가져다가 불쏘시개로 아궁이에서 태워버렸다고 한다. 아버지의 문학 때문에 그토록 먼 곳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아직도 문학에 골몰하는 아버지가 몹시도 싫었을 것이다. 

시인의 나이 75세 되던 1987년, 서울에서 ‘백석시전집’(이동순, 창비)이 분단 이후 최초로 발간됐으나 시인은 자신의 전집이 남조선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른 채 북에서 83세까지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시인의 애인 김자야는 일제 말 여전히 기생 신분으로 험한 세월을 보냈다. 늘 가슴에 간직해온 배움에 대한 열망을 실천에 옮겨 6·25전쟁 직전 중앙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 요정을 경영했는데 당시 바닷가 모래밭에 천막집으로 차려진 전시합동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기어이 졸업장을 받았다. 

1950년대 자유당정권의 실세였던 모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그로부터 큰 부동산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이 서울 성북동에 있던 요정 대원각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 부동산을 어느 승려에게 기증해서 길상사란 이름의 사찰을 조성했다. 거기에 그녀의 영정각이 있다. 

내가 1987년 ‘백석시전집’을 발간한 직후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인연으로 이후 10년 동안 각별한 정을 나누며 지냈다. 나의 권유로 백석문학상도 제정하고, 늘 백석 시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나이가 칠순이 넘었으나 여전히 청춘 시절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시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하는 때가 많았다. 

결국 내 간곡한 제의를 받아들여 백석 시인에게 못 다한 말, 가슴에 켜켜이 담아둔 말을 차곡차곡 모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란 에세이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세월이 갈수록 백석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어떻게 하면 시인을 위하고 추모하는 사업을 펼칠 것인지 틈만 나면 그 방법을 궁리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가 가진 부동산 가운데 일부를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 기증했는데 대학 당국에서는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금을 차곡차곡 적립해서 학생들에게 줄곧 장학금을 주었다. 인재양성의 멋진 실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카이스트에서 얼마 전 초청이 왔다. 새로운 대학 강의동을 건립하고 중앙에 대형 강의실을 조성하는데 그곳을 ‘김영한 홀’로 명명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영한은 자야 여사의 호적이름이다. 그녀의 거룩한 기증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많은 인재를 길러내게 되었으므로 그 숭고한 뜻을 높이 기리려는 계획이다. 

대형 강의실 입구 벽면에 자야 여사의 얼굴을 작가가 제작한 동판 부조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그런 뜻을 담은 글귀를 붙이려고 하는데 그 문장을 나에게 특별히 요청했다. 나는 기꺼이 카이스트의 제의를 수락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밤 새워 다듬었다. 자야 여사와 만나던 시절의 여러 추억들이 떠올라 새삼 눈시울이 젖는다. 여기 그 문장을 옮긴다. 

“1916년 서울에서 출생한 김자야(金子夜, 본명 김영한) 여사는 일찍이 조선권번 소속 예인으로 가무에 뛰어났다. 수필가로 등단했고,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백석 시인과의 사랑은 문단의 전설이 됐다. 여사는 만년에 큰 재산을 카이스트에 기증하여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다. 그 숭고한 뜻을 기려 이 대형 강의실을 ‘김영한 홀’이라 명명한다. 1999년에 세상을 떠난 여사의 거룩한 뜻은 천추만대에 길이 전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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