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0] 임진왜란 피난일기 ‘쇄미록’, “냇가의 임시 거처에서 자다 큰비에 기름종이 덮어”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0] 임진왜란 피난일기 ‘쇄미록’, “냇가의 임시 거처에서 자다 큰비에 기름종이 덮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7.17 13:21
  • 호수 8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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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은 총 7권으로 돼 있다.
‘쇄미록’은 총 7권으로 돼 있다.

종9품 오희문이 1591~1601년, 9년 3개월 피난 중에 쓴 일기

피난 중에도 혼례, 제사, 과거시험 치러져… 아들 급제 기뻐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임진왜란 때 백성들의 피난생활은 어떠했을까. 다행히도 조상들이 겪은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낱낱이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이란 책 덕분에 그 실상을 일부라도 엿볼 수 있다. 

쇄미록은 ‘보잘 것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으로 시경의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에서 따온 것이다. 총 7권 분량의 이 책은 오희문(吳希文·1539~1613년)이란 양반이 전쟁 발발전 해인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집으로 돌아간 1601년(선조 34)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간의 기록이다. 

오희문은 조선시대 토목과 건축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선공감에서 관리자 역할인 종9품의 감역(監役)을 지냈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오윤겸이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오달제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 항복할 것을 반대하다 끌려간 삼학사 중 한명이다. 오희문 자신도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오희문은 지방에 살고 있는 외거노비들에게 공물을 받을 목적으로 출장을 떠났다가 전북 장수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 내내 관아, 암자, 친지들의 집 등을 떠돌았던 그는 선조가 서둘러 한양을 버리고 파천한 것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4월 16일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문이 들더니 저녁나절에는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말이 들려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용맹하다던 장졸들은 왜놈 이야기만 듣고도 지레 무너져 큰 고을과 견고한 성이 하루도 못되어 함락되었다. 4월 30일 첫새벽에 주상께서 종묘를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고부터 왜적이 도성에 들어간 5월 3일까지 2~3일 동안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앞 다퉈 성문을 빠져나가다가 쓰러져 짓밟혀 죽고 혹은 뒤처지는 바람에 죽기도 했다고 한다. 만일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방어하면서 강을 따라 위아래로 목책을 많이 설치하고 먼저 배를 침몰시켜 길을 끊게 했다면 적이 아무리 강하고 날래다고 한들 어찌 강을 날아서 건널 수가 있겠는가. 이것을 헤아리지 않고 먼저 도망쳤으니 심히 애석하다.”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3대 기록물

왜군은 전쟁 내내 조선의 여인들을 겁탈하고 본국으로 보내는 등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일기에 “왜적이 영남 지역 반가의 여인 중 얼굴이 고운 사람을 뽑아 다섯 척의 배에 가득 실어 제 나라로 보내 빗질하고 화장을 시켰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대번에 노하기 때문에 모두들 죽음이 두려워 억지로 따른다고 한다. 이들은 사실 여기서 먼저 겁탈한 뒤 보낸 여자들이다. 그 뒤에도 그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러 적이 돌아가며 강간한다고 하니 더욱 비통한 일”이라고 기록돼 있다.

오희문은 석천암에 있다가 산속으로 피신했다. 7월 8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냇가에 임시 거처를 만들고 삼대로 덮고 자는데 밤중에 큰비가 갑자기 내려 즉시 기름종이 한 장을 덮었다. 그러나 퍼붓는 비에 물이 계속 새서 옷이 모두 젖었다. 갈모(비올 때 갓 위에 쓰는 기름종이로 만든 고깔)를 쓰고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전란 중에도 혼사와 제사는 이어졌다. 오희문은 1594년 8월에 큰딸을 함열 현감 신응구에게 시집보냈다. 신응구는 큰아들 윤겸의 친구로 피란생활 당시 오희문의 가족을 오랫동안 챙겼다. 2년 후에는 막내아들 윤성을 김백온의 딸과 혼인시켰다. 마지막으로 둘째 딸 혼례를 1600년 3월에 올렸다.

전란 중이지만 과거도 실시됐다. 1597년 3월 19일 일기에 아들 윤겸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적었다. 

“오후에 성균관 사람 5명이 한양에서 달려왔다. 급제 방목을 가지고 나팔을 불며 와서 알리는 말이 ‘그저께 저녁에 방목이 나왔는데 평강(오윤겸)이 급제했다’고 한다. 방목을 보니 조수인이 장원이고 윤겸은 일곱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온 집안의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희문은 1601년 2월 22일 강원도 평강을 출발해 나흘만인 26일에 한양에 들어갔다.   

쇄미록은 1601년 2월 27일 일기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마지막 일기에는 “셋째 누이 남매가 집사람에게 와서 보았다. 집안에 역병이 들었지만 4명의 남녀가 모두 잘 치렀고, 또 윤함(3남)의 처가 지난 14일 사시(9~11시)에 아기를 낳았단다. 게다가 사내아이로 7일 안에 큰 역병까지 잘 치렀다고 한다. 몹시 기쁘다. 이후로는 종이도 다되어 그만 쓰기로 했다. 또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씌어있다.

◇이순신 장군 죽음을 애도하지만…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조선시대의 3대 기록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록의 ‘징비록’ 그리고 오희문의 ‘쇄미록’을 뽑는다. 난중일기가 영웅의 일기인 반면 쇄미록은 평범한 양반이 전쟁 통에 어떻게 살아남아 가문을 이어갔는가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나름의 소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은 일기에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평가절하된 것 같은 느낌이다. 오희문은 1598년 12월 16일치 일기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조보를 보니 흉악한 왜적이 모두 바다를 건너갔고 명나라 수군과 우리나라 수군이 뒤쫓아 공격하여 다수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그런데 통제사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죽었고 전사한 수령 및 첨사, 만호가 10여명에 이르니, 죽은 군졸도 분명 많을 것이다. 탄식할 일이다. 명나라 장수인 총병 등자룡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순신은 난리 초기부터 전라도의 보루가 되었는데 지금 왜적의 탄환에 죽었으니 애석하다.”

‘한권으로 읽는 쇄미록’, 사회평론아카데미 발간
‘한권으로 읽는 쇄미록’, 사회평론아카데미 발간

위대한 영웅의 죽음을 명나라 장군과 병사들의 죽음과 비중을 똑같이 두는 것 같은 인상이다. 당시로선 이순신의 위대한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쇄미록은 개인의 사적인 기록을 넘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한권으로 읽는 쇄미록’(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발췌한 것임.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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