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기억과 기록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기억과 기록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3.08.0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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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형제들과 옛 추억을 이야기하다

서로의 기억서 상반된 내용 발견

당황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오늘 내가 쓰는 하루의 기록도

편견과 오해의 기록일 수 있어

형제, 자매가 나이 들고 모두 평안하니, 만나서 음식을 나누고 어렸을 때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최근 친정 동생들과 만나 즐거운 이야기로 끝이 없다가 어느새 단골 메뉴인 ‘삶은 달걀 논쟁’에 이르렀다. 

내용인즉, 어려서 엄마가 달걀을 삶아 주시면 형제간에 서로 노른자와 흰자를 바꿔 먹는 경우가 있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동생은 노른자를 싫어하고, 나는 흰자를 싫어해서 서로 바꿔 먹었다. 

그런데 동생들의 기억으론 ‘자신도 노른자를 좋아하는데 언니나 누나가 은근히 압력을 가해 자기는 거의 빼앗기다시피 해서 흰자만을 먹었다’는 거다. 억울한 나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실하게 부인했고, 동생들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 오늘도 끝없는 달걀 논쟁이 이어지자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보다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생들은 고집쟁이 누나를 놀려먹는 것으로 재미삼고, 나 또한 어리숙하게 놀림  당하는 역할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며 즐기지만, 처음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땐 정말 당황스러웠다.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할까?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실이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얼마나 충격을 받는지 모른다. 나는 분명히 상대가 잘못해서 사이가 멀어진 것 이라고 기억하는데, 상대는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섭섭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사람 간의 기억도 그렇지만, 내 안에서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억력이 시원치 않은 나는 기록에 엄청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이에 비해 남편은 많은 걸 분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과거 스마트폰이 없을 적엔 전화번호 200개를 다 외운다고 자랑하는 반면, 나는 200개는 커녕 20개도 못 외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수첩과 노트, 펜과 메모지가 필수인 ‘쓰는 인간’이다.

남편이 전화 통화를 하며 약속을 잡으면, 나는 옆에서 쪽지에라도 부지런히 기록한다. 어느 날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그런데 나는 그 쪽지를 들여다 보기 전엔 악속 자체를 기억 못할 때가 많다. 

머리 좋은 남편이 “내일 우리 약속 있잖아?”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급히 쪽지를 찾아 구체적인 사항을 확인한다. ‘기억’과 ‘기록’ 유형의 사람 둘이 만났으니 얼마나 환상의 조합인가.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고 주장하며 ‘쓰는 인간’인 나도 적지 않게 살아온 덕분에 이제 지나간 노트와 메모가 쌓여간다. 올해는 하루에 세 페이지씩 모닝 페이지를 쓰는 리추얼(Ritual, 규칙적인 습관)을 실행하고 있어서 노트가 또 늘어나고 있다. 뭘 하고 지냈는지,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고, 기분이 어땠고 하며 끝도 없이 쓰고 있다.  

어느 때는 이런 걸 왜 시시콜콜 쓰고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날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내용 아닌가. 게다가 나의 기억이고 나의 기록일 뿐, 진실과는 동떨어진 편견과 오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쓰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도 는다. 한 번 내 생각이 옳다고 여겨지면 자꾸 우기고 고집 피우기 일쑤다. 나이가 들면 그동안 지내온 세월이 적지 않으니, 자신의 기억도 이제 믿을만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 볼 일이다. 남이 그렇다면 그 말도 옳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아야겠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 세상에 그렇게 확실히 단정적인 건 많지 않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좋은 기억만 남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서러운 것, 분노에 찬 것, 후회스러운 것, 원망스러운 것들을 쌓아두기엔 내 머리와 가슴이 너무 작고 비좁지 않은가? 좋은 기억만 걸러 내 아주 선명하게 남기고 싶으면 그때 생생하게 기록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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