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4·19혁명공로자회 회장 “헌법 전문에도 나오는 4·19정신… 국경일로 정해야”
박훈 4·19혁명공로자회 회장 “헌법 전문에도 나오는 4·19정신… 국경일로 정해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8.21 10:33
  • 호수 8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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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 끼쳐

4·19혁명공로자회는 당시 시위 현장에서 끝까지 투쟁한 학생·시민들 모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설립 얘기가 나오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단체가 있어 관심을 끈다. 4·19혁명공로자회(회장 박훈). 박훈(82) 공로자회장은 8월 16일, “이승만을 용서할 수 없다”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수유리 4·19민주묘역에서)무릎을 꿇고 사죄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 회장은 이어 “역대 대통령들이 그렇듯이 이승만 역시 공과 실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그에 대한 재평가도 좋지만 그 전에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용서부터 구하고 난 뒤라야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훈 회장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시위현장에 끝까지 남아 부상자 등을 돌본 점을 인정받아 2010년 4월에 건국포장을 수상했다.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 대학원 농공학과 석사를 마쳤다. 서울시 초대민선 동대문구청장을 지냈다. 4·19혁명공로자회 서울시지부장을 거쳐 2022년 6월에 제9대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에 취임했다. ROTC 장교 출신으로 6·3동지회 서울시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4·19혁명기록물은 지난 5월에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화제가 된 바가 있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위치한 4·19혁명기념회관 내 사무실에서 박 공로회장을 만나 유네스코에 등재된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었다.

-4·19혁명기념회관을 처음 와 봤다.

“이 건물 자리가 원래 이기붕 집터였다. 정부 돈에 국민모금을 더해 건물을 지었다. 4·19혁명 관련단체 3곳이 입주해 있다.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이들의 유족들 모임이 하나이고, 팔·다리 등에 총상을 당한 분들의 모임인 혁명회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끝까지 투쟁했던 공로자회 등이다.”

-4·19혁명공로자회는 전국적인 조직인가.

“서울·경기·호남·영남 등 총 4개 지부에 246명의 회원이 있다. 지부마다 사무실을 갖고 있고 직원도 있다. 회원 대부분이 그 당시 학생 신분으로 교내 대대장이나 연대장 등 리더였던 이들이었다. 후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훈장을 수상했고, 국가로부터 매달 소액의 위로금도 받는다.”

-공로자회는 어떤 일들을 하는지.

“60년 넘게 활동해오고 있지만 공법단체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공법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오면서 4·19묘역에 묻히지 못한 이를 찾아 안장을 해드렸다. 최근까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배경이라면.

“2011년 419명의 발기인이 모여 유네스코 등재 추진을 선언했다. 1960년 2·28 대구 학생시위부터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원인, 전개과정 그리고 혁명 이후 사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등 혁명 전후 과정과 관련된 기록물 1019점을 모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제출했다.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영국 ‘더 타임스’)는 우리나라 정치 풍토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한 4·19혁명이 다른 국가의 혁명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국제기구가 인정한 것이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4·19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유로 “4·19혁명이 제3세계에서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인 동시에 유럽의 1968년 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일본의 안보투쟁 등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닌 점”을 내세웠다.

-그날 개인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나.

“당시 저는 을지로에 있는 공고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려는데 교장과 담임선생이 교문을 걸어 잠그고 막아섰다. 학교 담을 넘어 광화문 쪽으로 가던 중 내무부 건물 있는 데서 딱 걸렸다. 내무부 앞이 아수라장이었다. 총탄이 날아오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부상자를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그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후에 계엄령이 선포돼 학교에는 가지 않았고 거리로 나가 시위를 계속 했다. 4월 19일 그 날에만 국민학생(초등학생) 6명, 중학생 24명, 고등학생 39명, 대학생 24명, 일반인 86명 등 200명 가깝게 사망했다. 학생 중에는 고등학생의 희생이 제일 많았다. 아까운 생명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치학 전공인데 대학원은 농공학과를 다녔다.

“부친께서 경영하던 기업을 제가 물려받기를 원했다. 종업원 300명을 데리고 25년간 ‘협산농기’라는 농기구업체를 경영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갔다가 공고를 다니게 된 것도 부친의 희망에 의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크다(웃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클 텐데. 

“그렇다. 200명 가까운 이들이 그로 인해 하나뿐인 목숨을 잃지 않았나.”

-이기붕 등 밑에 사람들이 한 행동이라고 하는데.

“그렇더라도 책임은 가장 윗사람이 지는 법이다.”

-1960년대 한일회담에 반발했던 대학생들 모임인 ‘6·3동지회’ 서울시지회장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정희 때문에 독재에 항거하다 감옥에 가고 사형 당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나라 경제 성장의 주춧돌을 놓은 지도자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선.

“외교·국방·안보 등 잘 하고 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퍼주기로 일관했다. 그 결과 어땠나. 우리가 지원해준 물자로 핵을 만들지 않았나. 대북 정책이 힘에 의한 균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힘을 갖췄을 때만이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미래 세대를 향한 대일 외교도 바람직하다. 과거사에 매달려 벽을 쌓고 지내는 건 국제사회에서 도움이 안 된다. 경제적으로 일본에 뒤졌을 때 취했던 행동을 고수하는 건 문제가 많다.”

박훈 공로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자유·민주·정의란 4·19정신이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다”며 “앞으로 4·19혁명기념관과 전시관을 짓고, 4·19혁명기념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훈 4·19혁명공로회장 프로필

▷성균관대 정치학과 졸업

▷건국대 대학원 농공학과 졸업(석사)

▷육군 ROTC 장교 전역

▷협산농기 대표

▷동대문신문사 대표

▷서울시 초대 민선 동대문구청장

▷6·3동지회 서울시지회장

▷4·19혁명공로자회 서울시지부장

▷4·19혁명공로자회 제9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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