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1] 가을을 기다리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1] 가을을 기다리며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3.09.04 10:15
  • 호수 8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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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기다리며

정신없이 농가의 일 수고롭다가

가을 들어 잠시 잠깐 틈 얻고 보니

단풍 물든 언덕에는 기러기 날고

비 맞은 국화 둘레 귀뚜리 울며

목동은 피리 불며 안개 속 가고

나무꾼은 노래하며 달빛 속 오네

일찍 주워 모으기를 사양 말게나

산 배 산 밤 텅 빈 산에 널렸을 테니

搰搰田家苦 (골골전가고)

秋來得暫閑 (추래득잠한)

雁霜楓葉塢 (안상풍엽오)

蛩雨菊花灣 (공우국화만)

牧笛穿煙去 (목적천연거)

樵歌帶月還 (초가대월한)

莫辭收拾早 (막사수습조)

梨栗滿空山 (이율만공산)

- 김극기(金克己, 1150(추정)~1209), 『동문선(東文選)』 제9권, 「오언율시(五言律詩)」<농가의 네 계절[田家四時] 4수 중 제3수 가을>


(전략)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날은 여름 중에서 가장 무더운 20일을 말한다.(중략)

입추는 ‘가을이 들어선다’는 의미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는 절기이다. 24절기 중 열세 번째로 대서(大暑)와 처서(處暑) 사이에 있는 절기인데, 올해와 같이 양력으로는 대개 8월 7, 8일 무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입추부터 입동(立冬) 사이를 가을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입추와 말복을 다 지난 지금은 가을이어야 하는데, 어디를 보아도 가을 같지 않다. 아니 가을 기운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가을이 아니라 가을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김극기의 이 시를 보면 왜 가을이 기다려지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정신없이 농사 일을 하다가, 가을이 되어 얻은 잠시의 한가함에 둘러본 주위의 풍경은 가을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단풍으로 물든 골짜기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와 비 맞은 국화 떨기 주변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피리를 불면서 안개 속을 걸어가는 목동과 노래하면서 달빛 아래 걸어오는 나무꾼의 모습은 수련의 둘째 구에서 말한 잠시 잠깐의 틈[得暫閑]을 통해 얻게 된 가을 풍경으로 한적함과 여유로움 그 자체이다. 여기에 더해 김극기는 미련에서 도치법을 사용하여 자문자답하며 가을의 풍요로움에 대해서까지 말했다. 주인 없는 빈 가을 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 배와 산 밤이 썩기 전에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계절에도 불가능한, 오로지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넉넉함과 부유함이다.

이 시는 당시 농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그려낸 시로 평가받는데, 이 시에서는 가을의 정취를 담고 있는 자연물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볼 수 있는 농가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함련과 경련이 주목된다. 특히 함련에서 단풍의 붉은빛과 국화의 노란빛, 하늘을 나는 기러기와 땅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단풍과 기러기를 모두 꾸며주는 서리[霜]와 국화와 귀뚜라미를 모두 꾸며주는 비[雨]의 대비는 이 시가 시적인 기교에서도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하략)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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