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백석 시인의 말년과 귀양살이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백석 시인의 말년과 귀양살이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3.09.04 11:45
  • 호수 8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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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문화힐링센터 대표

해방 후 북한에 남은 백석은

당과 수령 위한 문학에 반발하다

협동조합 농장으로 강제 이주

양을 치며 틈틈이 시를 썼지만

원고뭉치는 불쏘시개로 사라져

해방 후 북한 문단은 오로지 김일성 체제의 구축을 위한 도구적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것이 6·25전쟁 시기로 접어들고부터는 문학이 전쟁 수행을 위한 총포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모든 역량이 오로지 당과 수령을 위한 기계적이고 도구적인 창작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언설로 들끓었다. 이런 문학의 관점은 시 장르의 기형적 변질을 불러오게 되었고, 김일성의 생애를 신격화시키는 서사시가 집중적으로 양산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백석 시인은 북한 문단의 이런 경직된 분위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북조선문예총의 외국문학 분과 소속으로 묵묵히 번역작업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대세의 흐름을 나만 혼자서 거스르고 역행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다. 

백석은 1956년부터 북한의 아동문학 저널인 ‘아동문학’지에 여러 편의 동화시를 발표한다. 그런 과정에서 북한 아동문학계의 현실에 나타난 문제점을 정리한 비평도 세 차례나 발표했다. 하지만 이게 화근이었다. 이원우가 백석의 글에 먼저 모질게 시비를 걸어왔다. 이어서 김명수, 이효은 등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백석의 글을 잇달아 비판했다. 

모두 하나같이 백석에 대한 일방적 공격이었고, 문단의 중심에서 아주 제거하려는 뜻이 역력했다. 북한문단에서 문학적 순정성을 추구하려는 백석의 뜻이 수용될 까닭이 없었다. 이후로 백석이 쓴 모든 글들은 마치 부메랑처럼 독화살이 되어 거꾸로 날아왔다. 

하지만 백석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북한문단의 경직된 분위기를 개선하며 진정한 변화를 촉구하려는 갈망을 쓴 비평문을 발표했다. 

결국 백석의 평소 문학적 관점과 활동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이를 꼬투리 삼아 북조선문예총의 방침과 강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 집중적 공격과 매도를 퍼부었다. 심지어 자본주의와 타협하려는 수정주의적 시도라며 백석을 모질게 비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 누구도 백석을 위해 방패막이로 나서주는 지원군이 없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점점 소외와 격리상태에 빠져들게 되면서 결국 북조선문예총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자아비판을 하게 됐다. 

그 당시 백석 시인의 심정을 가만히 짐작해본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얼마나 참담하고 형언할 길 없는 모욕감을 느꼈을 것인가. 삶의 아무런 의미조차 가슴 속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백석 시인의 나이 48세 되던 1959년 1월, 세상 모든 것이 겨울의 중심에서 꽝꽝 얼어붙었던 시절이었다. 시인의 가슴은 그 동장군보다 한층 두껍게 얼어붙었다. 공포의 혹한 속에 백석은 가족들과 평양에서 쫓겨나 압록강과 두만강이 함께 만난다는 양강도 지역의 삼수군 관평리 국영협동조합으로 강제이주 됐다. 

트럭은 시인의 가족들을 짐짝처럼 황야에 버려놓고 떠나버렸다. 누구든 이런 산골로 쫓겨 가게 된다는 것은 완벽한 정치적 숙청(肅淸)이었던 셈이다. 평양에서 하는 짓이 꼴 보기 싫으니 아주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거기서 죽든 살든 아주 나오지 말라는 뜻이다. 북한당국의 이런 조치도 일종의 제노사이드가 아니었을까. 

양강도의 관평리란 곳은 해발 800m의 산중턱이다. 그 마을에는 축산반이 설치돼 있어서 양과 돼지를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삼수군 국영협동조합 산하의 하위 기관이었는데 거기서 백석 시인과 가족들에게 부여된 업무는 주로 목장의 돼지와 양을 돌보는 일이었다. 

평양에서 시를 쓰고 문학에만 골몰하던 샌님이 이토록 궁벽한 산골로 쫓겨 와서 어떻게 목장의 힘든 육체노동을 감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무엇보다도 아내와 자녀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터이다. 

시인의 가족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길로 아버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을 것이다. 모든 불행의 발단은 아버지가 써서는 안 될 시 따위를 썼기 때문이다. 그 못된 놈의 시 나부랭이가 가족 전체를 이런 봉변과 모욕, 불행 속에 빠뜨렸다고 날마다 원망했을 것이 뻔하다. 

시 때문에 그토록 봉변을 겪었으면서도 백석 시인은 관평리 목장에서 여전히 시 쓰기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눈이 내리거나 새소리가 들리면 가슴 속에 가라앉았던 시적 감흥이 일어나 무언가를 끼적거렸다. 한 번 익힌 시인의 예전 버릇을 쉬 청산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시를 쓰다가 뜬금없이 이 아름다운 관평리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당과 수령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의 편지를 써서 문예총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전혀 마음에서 우러난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내는 시작품들이 어찌된 일인지 단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다. 당과 북조선문예총에서 아마도 모종의 어떤 명령을 여러 기관에 내려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백석의 모든 작품을 일절 게재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꾸준한 시 창작에 대해 아이들의 원망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어느 해 겨울,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아이들이 아궁이에 군불을 때는데 장작은 어렵게 구했으나 불쏘시개가 없었다. 아들이 달려가서 아버지의 시작품 메모를 해둔 책상 서랍의 원고뭉치를 냉큼 들고 와서 불을 붙이고 장작의 불쏘시개로 썼다. 백석 시인이 몰래 써둔 만년의 시작품들은 모조리 관평리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서 불꽃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시 원고가 불꽃이 되고 또 그것이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워서 가족들에게 전해줄 한 점의 온기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느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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