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오래된 모과나무를 심다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오래된 모과나무를 심다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3.09.25 11:01
  • 호수 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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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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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100년쯤 된 모과나무 한 그루

정원에 옮겨 심으니 남다른 느낌

이 나무에 얽힌 갖가지 사연 등

생명체의 시간 함께 들여놓은 듯

주인보다는 관리자로 잘 가꿀 것

“아버님, 이번 생은 끝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네요. 저도 이제 그만 할랍니다. 아버님 원하는 대로 사는 거 이제 그만하고, 나도 내 맘대로 살래요.” 

칠순을 넘긴 장남이 풀이 무성한 부모님의 무덤가를 벌초하며 이런 말을 읊조렸다고 한다. 조상에게 받은 땅을 터전으로 50년 넘게 나무도 심고, 가꾸어 남부러울 정도의 부를 축적한 분이다. 

하지만 결국 이 많은 재산 탓에 아내, 자식들과 싸움이 나고 결국은 아픈 몸으로 황혼에 혼자가 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고백을 들었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분의 허탈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하루종일 가슴도 먹먹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가라앉기만 했다. 집 수리를 하는 중이라 마당에 놓을 나무 한 그루 사기 위해 찾아갔던 길었는데 그만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고 말았다. 

요즘 나는 속초에서 집과 정원을 수리 중이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지난 2013년 속초에 터전을 잡았으니 올해로 꼭 10년 차가 됐다. 

워낙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 큰바람 치는 날이면 집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170년이 넘은 이 오래된 한옥집의 대들보며 석가래 목재가 견디어 주니 고마울 뿐이다. 

석가래 사이 페인트칠도 다시 하고 바닥에 마루도 다시 놓고, 그리고 정원도 이제 나이 들어갈 일을 생각해 되도록이면 나 혼자의 힘으로도 관리가 가능하게 바꾸고 있다. 

그동안 정원디자인 일을 하면서 큰 원칙 중의 하나가 큰나무를 옮겨 심지 않는 것이었다. 큰나무가 들어서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질 터이지만 집을 오히려 압도할 가능성이 높고, 또 식물의 자생력을 생각해봐도 힘겨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신 디자인적으로는 작은 나무를 심어 나무가 크는 세월만큼 우리도 함께 성장하는 걸 권장한다. 하지만 이번 속초집 정원을 리노베이션하는 과정에서는 마음을 바꿔 정말 크고 오래 묵은 모과나무를 한 그루 들였다. 

이 오래된 집에 어울리는 나무 한 그루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겠냐는 남편의 권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무를 결정하고, 막상 옮기려고 보니 무게만 무려 3톤, 뿌리 지름이 1.5미터가 넘었다. 운반도 어려웠지만, 도착 후에도 크레인과 지게차를 이용해 깊숙한 앞마당 정원에 도착시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모과나무는 심은 직후부터 한잎, 두잎 노랗게 단풍이 들어 추적추적 오는 빗속에 지금은 가을 분위기를 물씬 일으키는 중이다.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긴 했지만 큰 나무, 오래된 나무를 옮겨와 심어보니 참 다르다. 

굵은 가지를 만지다 보면 이 나무를 맨 처음 심었던 이는 누구였을까?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나무를 어디에 심었을까? 그리고 몇 번의 주인이 바뀌었을까? 모과나무는 지금의 주인이 된 나와 우리 가족을 사랑해줄까? 그냥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아니라 100년도 넘게 살아온 생명체의 시간을 함께 들여놓은 느낌이다. 

사실 속초의 이 오래된 한옥집을 구입할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 집을 처음으로 지었던 이의 마음, 그리고 이 집을 거쳐간 주인들의 마음이 이 집에 남아 있다는 느낌들. 사실 이 지구의 땅을 우리는 경계를 치고, 서류를 만들어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고, 매년 재산세를 내며 이곳이 내 땅이라고 말뚝을 박는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맞을까? 결국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고 돌려주는 일임을 어쩔 수 없게 깨달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소유를 해서 무엇하랴, 다 버리고 살자는 종교적 무욕까지는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듯 싶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늘 들곤 한다. 영어에 ‘Stewardship’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는 ‘관리자’가 될텐데, 땅의 주인보다는 어쩌면 ‘땅의 관리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게 아닌지. 

2013년부터 이 땅의 관리자가 된 나는 성심성의껏 이곳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 막 들어왔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모과나무의 입주날인 2023년 9월을 기억하고, 이 나무에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는 것은 지켜보며 나의 가족,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열심히 빌어볼 참이다. 그 중에서도 말년에 많은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이 모과나무의 전주인을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을 참이다. ‘부디, 그의 삶이 조금 더 평온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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