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7] 조선에서 가장 불운한 남자 이세좌, 연산군 “내 옷까지 적셨으니 국문하라”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7] 조선에서 가장 불운한 남자 이세좌, 연산군 “내 옷까지 적셨으니 국문하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9.25 13:47
  • 호수 8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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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양로연을 열어 대신들에게 술을 따라 주기도 했다.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연산군은 양로연을 열어 대신들에게 술을 따라 주기도 했다.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양로연서 임금이 하사한 술잔 엎질러 불경죄로 유배

연산군 친모에 사약 가져간 일로 결국엔 사약 받아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에서 가장 불운했던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세좌(李世佐·1445~1504년)이다. 연산군 때 예조판서를 지낸 이세좌는 임금이 내리는 어사주를 엎질러 용포를  적시는 사소한 실수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세좌보다 허무하게 죽은 이는 조선 500년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세좌는 성종 때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대사간으로 특채됐다. 그만큼 똑똑했다. 1485년에 이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돼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 축조를 담당했다.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 순변사로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 임무를 성실히 해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무오사회 때 김종직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판중추부사를 거쳐 예조판서와 지경연사(知經筵事·정2품)를 겸임했다.

때는 1503년 9월 11일, 연산군 9년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이세좌가 임금이 내린 술(어사주)을 반 이상 엎지르는 일이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에 당시 일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연산군: “오늘 잔을 드린 재상들에게 회배(回盃)를 내릴 때 반 이상을 엎지른 자가 있는데 이런 일이 어떤가?” 

•승정원: “과연 엎질렀다면 매우 공손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신하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연산군: “예조판서 이세좌가 잔을 드린 뒤 회배를 내릴 때에 내가 잔대를 잡았는데 세좌가 반이 넘게 엎질러 내 옷까지 적셨으니 국문하도록 하라.”

다음날 연산군은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연산군: “이세좌가 하사하는 술을 엎질러 내 옷까지 적시고 자리 위에도 흘러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 재상은 작은 과실이 있더라도 사하여 주는 것이지만 이것은 심히 공경스럽지 못한 일이니 버려둘 수 없다. 더구나 자신이 예관으로서 이럴 수가 있느냐?”

◇임금이 열흘 가까이 트집 잡아

연산군은 사흘 후에 다시 “대신을 속바칠 수 없으니 다만 본직을 체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또 이 일을 입에 올렸다.

•연산군: “이세좌의 초사(招辭·죄인이 자기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숨이 헐떡여 진정하지 못하고 신체가 비둔하기 때문에 공경하고 조심하기를 너무하다가 엎지르는 줄도 몰랐다’ 하였는데 이 말이 사실이 아니다.”

그러자 승지 허집 등이 “동료들 가운데서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찌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연산군: “이세좌의 일은 경들이 반드시 들었을 줄 아오. 좌의정과 허침은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역시 모두 술을 마셨소. 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하다 하지만 좌의정의 유가 아니오. 대신을 죄줄 수 없기 때문에 그 직만을 갈체하였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윤필상, 성준 등: “성상의 전교가 지당하오나, 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또 성상의 위엄이 황공스러워 자기 딴에는 빨리 마시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잔치를 파한 뒤 세좌가 자랑삼아 말하기를 ‘내가 평시에는 술을 못 마셨는데 오늘은 횟배를 다 마셨다’라고 하므로 만일 세좌가 일부러 엎질렀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겠습니까? 이로 보면 세좌는 반드시 그렇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연산군: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매우 그른 일이다.”

연산군은 양로연에서 있었던 일을 일주일 이상 거론했다. 이를 빌미로 이세좌를 어떻게든 벌주려는 의지가 강했다. 연산군은 대간들마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이 이세좌의 위세 때문이라며 그 자식들까지 관직에서 해임시키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연산군: “이계동이 과일을 던져 기생을 희롱한 것도 대간이 오히려 탄핵하였는데 이세좌는 하사하는 술을 엎질렀으니 이는 교만 방종하여 그런 것이니, 계동의 일보다도 공손스럽지 못함이 더욱 심하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나 대간이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이는 세좌의 아들 이수의가 한림(임금의 명령을 글로 짓는 일을 함)이고, 이수정이 홍문관원이기 때문에 세력이 무서워 말하지 않는 것이다. 수의 등은 청요한 자리에 있는 것이 옳지 않으니 갈도록 하라.”

◇남편 죽음 예측한 이세좌 부인 

연산군은 사고 발발 9일 만인 9월 20일에 이세좌를 전라도 무안현에 부처(付處)했다. 기어코 이세좌를 유배 보낸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세좌를 4개월만에 유배에서 풀어주면서 “이세좌는 죄를 정한지 오래지 않으니, 지금 놓아주는 것이 빠른 것 같다. 그러나 나이 늙고 학식이 있어 또한 이미 스스로 징계하였을 것이며, 또 은혜를 반포하는 때이므로 특별히 놓아준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다시 술을 하사하며 “이것은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세좌가 울면서 사례했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1482년(성종18년) 8월에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는다. 이세좌는 사약 먹고 죽기 싫다며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다. 연산군은 이세좌가 죽은 후에도 뼈를 파내어 분쇄하게 했다. 그만큼 친모에 대한 복수의 집념이 강했고, 당시 관련자들을 증오했던 것 같다.

한편 이세좌가 약사발을 들고 갔던 날의 일이다. 아내 조씨가 남편에게 “조정에서 폐비를 논하더니 결과가 어찌 되었소?”하고 물었다. 이세좌가 “오늘 이미 사약을 내렸고 내가 봉약관(奉藥官)이었다“고 대답하자 부인이 ”슬프다! 우리 자손의 씨가 마르겠구나. 어머니가 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아들이 어찌 다른 날 보복을 하지 않겠는가”하고 탄식했다. 

조씨는 앞을 내다보는 현명한 아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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