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8] 조선 사대부의 ‘집 자랑’, “남산 자락의 530칸 대저택… 경복궁·종묘가 한눈에”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8] 조선 사대부의 ‘집 자랑’, “남산 자락의 530칸 대저택… 경복궁·종묘가 한눈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0.23 14:36
  • 호수 8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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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저택 중 하나인 운조루.
조선시대 대저택 중 하나인 운조루.

사대부들 17~18세기 한양에 저택 짓고 시화 열어 부러움 사

홍경모의 ‘사의당’이 대표적 건물… 중국 황제의 벼루 등 수장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대부의 거주 공간에 새바람이 불었다. 인조반정 이후 영호남으로 쫓겨내려 간 자들이 한양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양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이들은 ‘경화세족’으로 도성 근교에 제2의 고향을 만들었고, 도성 안에도 거대한 주택을 장만했다. 경화란 번화한 서울을 뜻하고, 세족은 여러 대에 걸쳐 자리 잡은 가문을 뜻한다.

홍양호의 사의당, 신위의 벽로방, 심상규의 가성각, 김조순의 옥호정 등이 당시 도성에서 가장 이름난 저택이다. 홍양호(1724~1802년)는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글씨를 잘 써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와 수원성의 북문루 상량문을 남겼다.

홍양호의 6대손인 홍경모(1774~ 1851년)는 진고개에 있던 자신의 집 사의당에 대한 기록을 모아 ‘사의당지’(四宜堂志)를 편찬했다. 진고개는 서울 충무로 2가 중국대사관 뒤에 있는 언덕길이다. 사의당지는 건물 구조와 실내 인테리어, 조경 그리고 건물 안팎에 두었던 기물, 나무와 괴석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홍경모는 조선의 음악을 정리한 ‘국조악가’, 조선의 역대 고사를 정리한 ‘대동장고’, 기로소의 역사를 정리한 ‘기사지’ 등 중요한 국고문헌을 저술한 대학자로서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인조가 공주 위해 지어준 ‘사의당’

사의당은 처음에 인조가 딸 정명공주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정명공주는 이를 넷째아들 홍만회에게 물려주었다. 홍만회가 1671년 집을 새로 짓고 이름을 사의당이라 지었다. 건물과 대지를 합하여 530칸이다. 이 집은 이후 홍중성, 홍진보, 홍양호, 홍낙원, 홍경모에게 차례로 상속됐다. 

‘사의’라는 단어는 조선 선비들이 좋아하는 단어이다. 여러 선비가 이 단어를 넣어 집 이름을 짓곤 했다. 가령 안평대군은 낙산 아래에다 충·효·우·신(忠·孝·友·信)의 네 가지 덕목을 뜻하는 의미의 ‘사의정’을 짓기도 했다. 홍만회는 꽃과 돌, 거문고, 바둑을 즐겼는데 이 네 가지를 즐기기에 마땅한 집이란 뜻으로 사의당이란 명칭을 취한 듯하다.

사의당은 성 전체 안팎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어 전망이 뛰어났다. 왼쪽으로는 종묘를, 오른쪽으로 사직을 끼고 있으며, 경복궁과 새로 지은 창덕궁의 용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사의당 본채인 정당은 100칸짜리 건물이었다. 거주보다는 업무를 보기 위한 공간인 정침 하나, 좌우에 딸린 익실 하나, 하당이 뒤쪽과 바깥쪽에 하나씩 있었다. 처음에는 온돌방과 마루의 비율이 1대 2였다가 나중에는 온돌이 더 많아졌다. 조선시대 온돌은 부유한 집에서 사용되다가 19세기 무렵부터 보편화됐다. 

홍경모는 “온돌방과 시원한 마루, 다락과 문, 행랑 등의 제도가 질서 정연하게 갖추어졌다. 뒤로 높은 언덕을 등지고 있는데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문이 큰 길에 임해 있으며, 키 큰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남산 아래 제일가는 저택이었다”고 적었다.

정당의 서쪽에 시회를 열었던 수약당이 있었다. 바깥쪽에는 송준길이 쓴 편액을 걸고 안쪽에는 조상우가 쓴 편액을 걸었다. 홍만회의 아들 홍중성이 이곳에서 조유수·이병연 등과 시사를 결성해 날을 정하여 술을 장만한 후 수창하여 당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고서화·골동품 수집하고 즐겨

홍만회는 사의당을 지을 때부터 정원의 계단에 나무와 괴석을 많이 두었다. 사의당 남·서쪽에 각기 정원이 있었다. 남쪽 정원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 푸른 회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서쪽 정원에는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노송이 다섯 그루 있었다. 이외에도 원반노송·종려나무·매화나무·배롱나무·모란·백목련·출장화·금등화·불정화·흰진달래·정향·금죽 등 다양한 조경수와 반송·매화·벽오동·사계화 등의 분재가 심어져 있었다. 

사의당의 종려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682년 숙종이 사의당에 종려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신하에게 명하여 이를 구하자 홍만회는 신기한 초목으로 임금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였다면서 나무를 뽑아버렸다. 숙종은 이 말을 듣고 대궐 후원에 있던 종려나무를 뽑아 민가로 돌려보냈다. 이 일은 후에 사대부 사이에 미담으로 널리 퍼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 정원에 나무와 함께 꼭 필요한 것이 괴석이었다. 사의당에는 중국에서 구입한 ‘태호석’ 등 높이가 4~5척 되는 괴석도 있었다. 돌로 만든 거북 하나는 조각이 기이하고 교묘해 살아 움직이는 듯 했고, 등에는 해시계 일영과 24방위가 새겨져 있었다.

실내에는 많은 서화가 있었다. 서예에 관심이 많았던 홍양호는 주나라 선왕의 사냥을 송축한 ‘석고문’ 등 많은 중국 고대의 탑본을 수집했고, 금석문의 최고 전문가답게 중국 고대의 금석문도 많이 진열해놓았다.

홍양호는 또 역대 명필의 글씨를 두루 수집했다. 공민왕이 쓴 ‘강릉임영관액자’, 안평대군의 진본인 ‘비해당첩’, 양사언의 ‘금강산만폭동석상대자’ 등이 그것이다.

사의당에는 값진 그림도 많았다. 이공린이 그린 ‘제이직공도’와 장로가 그린 ‘하량읍별도’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 앞·뒤 면에 금으로 포도를 그린 현학금, 물소의 뿔인 서각 등이 집안 곳곳을 장식했다.

이밖에도 진귀한 문방구가 있었다. 한나라의 태자궁에서 사용하던 박산향로를 본딴 옥향로를 비롯해 군자배와 마류배 등 술잔, 명나라 선종이 사용하던 선덕연이란 벼루, 일본에서 들어온 투호 등이다. 선비의 필수품 중 하나인 다구는 중국 강희제 때 복제품으로 만든 절품이 대부분이었다.

홍경모는 사의당을 물려받아 살면서 느낀 소감을 남겼다. 

“우리 집은 날아오르는 화려한 처마도 없고 뜰은 좁아 겨우 말을 돌릴 정도이다. 나지막한 서까래와 엉성한 창문이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이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서 거처하고, 이곳에서 노래하고 통곡한 지 100년 가까이 되었다. 높다란 들보 때문에 생기는 근심을 겨우 면하고 편안하게 집에서 살 수 있는 행복을 전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우리 선조가 근실하고 근면한 덕이 후세에 넉넉히 드리운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 기사는 ‘사의당지, 우리 집을 말한다’(홍경모·이종묵 옮김·휴머니스트)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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