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9] 한양 천도 뒷이야기 “조선의 수도 이전은 ‘동전 던지기’로 결정됐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49] 한양 천도 뒷이야기 “조선의 수도 이전은 ‘동전 던지기’로 결정됐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1.06 14:30
  • 호수 8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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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후 10여 년 조선의 수도는 한양 아닌 개경… 대신들 반대로  

이방원이 한양·개성·무악 등 후보지 놓고 종묘에서 마지막으로 낙점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의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년)가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후 무려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당시는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이 한양보다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다. 신하들과 백성은 낯선 신도시보다 생활에 편리한 개성에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물며 천도 자체를 방해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계룡산 허위 보고이다. 이성계가 후보 도시 중 하나인 충청도 계룡산을 둘러보려고 말을 타려는 순간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개경에 눌러앉고 싶었던 대신들의 조작된 가짜 보고였다. 이성계도 이를 간파해 그대로 밀고나갔다.

계룡산 천도는 영의정 하륜(1348~1416년)의 반대로 저지됐다. 하륜은 계룡산이 도읍으로 삼기에 너무 남쪽에 처져 있고 풍수지리학으로도 좋지 않다고 했다. 하륜의 제안에 대신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다음 후보지는 무악산 일대였다. 지금의 서대문구 안산이다. 이 역시 찬반 여론이 팽팽했으나 궁궐을 짓기에 지형이 좁다는 이유에서 물 건너 갔다. 이성계는 1394년 8월 13일 한양을 조선의 도읍지로 최종 낙점했다. 처음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포한 날로부터 2년여 만이다. 그러고도 실제로 한양이 수도 구실을 한 것은 10년 후인 1404년 10월 6일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한양 지도
조선시대 한양 지도

◇왕궁은 개경, 제사는 한양에서 

후세 사람들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날로부터 바로 수도가 한양인 줄 착각하고 있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의 둘째아들 이방과(조선 2대 왕 정종·1357~1419년)가 왕위에 올랐을 때도 조선의 수도는 개경이었다. 

정종의 2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을 거쳐 이성계의 5남 이방원(조선 3대 왕 태종·1367~1422년)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도 조선의 수도는 여전히 개경이었다.

왕이 신하들을 재촉해도 신하들은 중국의 예를 들며 천도를 하지 않으려 했다. 좌정승 조준은 “한양은 태조께서 창건한 도읍지이고, 개경은 인민이 생업에 안정된 땅이므로 양경을 폐지할 수 없으니 개경에 따로 종묘를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서 사시의 제사를 두 곳에서 모두 행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태종이 이 간언을 받아들여 의정부에 명하기를 “당분간 한양과 개경 두 곳을 오가며 양도를 폐지함이 없도록 하라, 다시는 의논하지 않겠다”고 했다. 1404년 7월 10일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해 9월에 하륜이 갑자기 무악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청했고, 태종이 이 말을 듣고 어가를 타고 무악을 보러가기도 했다.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마음껏 의견을 개진해보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무악 역시 규국(規局·길지로 확정하는 범위 안의 땅)에 바로 합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도로서 적당치 않다는 말이 나왔다. ‘한양도 명당이긴 하지만 물이 끊겨 좋지 않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자 태종이 화를 내며 조준에게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경은 재상이었다”며 “어찌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웠는가”라고 따졌다. 그때 왜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한 것이다. 그러자 조준이 “신은 지리를 알지 못합니다”고 답했다. 

◇중국도 동전 던졌으니 우리도…

태종은 “이제 종묘에 들어가 개경과 한양과 무악을 고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며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이 있더라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무엇으로 점을 쳤으면 좋겠느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제학(규장각에 속한 종일품이나 정이품 벼슬) 김천이 “점괘의 글은 의심나는 것이 많으므로 가히 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라면서도 “척전(擲錢)은 종묘 안에서 할 수 없으니 시초(蓍草·점을 치는 데에 쓰는 댓가지)로 하자”고 의견을 냈다. ‘척전’이란 쇠붙이의 돈을 던져서 그 드러나는 표리(表裏)를 따라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 사람이 함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다. 척전이 중국에서도 또한 있었다. 고려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는가?”라고 물었다.

조준이 “역시 척전을 썼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종이 “그와 같다면 지금도 척전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를 한 뒤에 좌정승, 대사헌 등을 거느리고 묘당에 들어가 상향(上香)하고 꿇어 앉아 완산부원군 이천우(이조판서)에게 명하여 반중에 척전하게 했다. 한양은 2길 1흉이었고, 개경과 무악은 모두 2흉 1길이 나왔다.

임금이 나와서 의논이 이에 정해지니 드디어 향교동(鄕校洞· 서울 양천향교 근방)동쪽 가를 상지하여 이궁(離宮·임금이 국도의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을 짓도록 명하고, 어가를 돌이켜 광나루에 머물러 호종하는 대신과 더불어 말했다.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요즘 무악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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