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소중한 추억 만들기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소중한 추억 만들기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3.12.04 11:33
  • 호수 89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은경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집안에서 단조로운 생활 계속 땐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말에 공감

동해안 양미리 축제에 다녀와

후회·미련·원망 비워낸 자리에

소중한 추억 만들어 채워 나갈 것

어릴 때 연탄불에 구워 먹던 양미리가 먹고 싶었다. 속초 동명항을 찾았다. 마침 동해안은 양미리 철이었다. 길거리에 붙은 현수막이 양미리 축제를 알리고 있었다.

바닷가에는 하얀 고깔모자같이 생긴 천막으로 지붕을 삼은 양미리 구이집 20~30곳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인심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양미리만 구우면 한 접시에 2만원, 도루묵·가자미 말린 것 한 마리까지 하면 3만원이다. 종합세트로 한 접시를 시켰다. 가게 밖, 바다를 향한 쪽에서 번개탄 두 개에 불을 붙여 그 위에 석쇠를 놓고 양미리와 도루묵을 올려놓았다. 

우리 어렸을 적엔 간식거리가 흔치 않았다.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면 짚으로 엮은 새끼줄에 꿰어놓은 양미리를 몇 마리 뽑아 연탄불에 구워 먹었다. 바람에 꾸덕꾸덕 마른 양미리는 연탄불 위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었다. 

새끼줄 중간쯤에서 몇 마리를 빼먹고는 안 먹은 척 남은 양미리 간격을 가지런히 손보아 놓았다. 먹은 표시가 안 나도록 애쓴 우리 솜씨를 엄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셨을 거다.

주인 아주머니가 생선을 굽는 사이, 가게 앞 바닷가에 나가 보았다. 아주머니들이 그물에 가득 걸려온 양미리를 몇 시간씩 뜯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전 중 일을 마치면 일당 5만원부터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작업량이 많은 날은 15만원도 받는다고 한다. 

납작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종일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일하니 허리가 많이 아프고, 추운 날은 얼굴이 퉁퉁 붓는다고 한다. 그래도 저렇게 집중해 작업을 하다 보면 세상사 복잡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새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마시는 한 잔의 믹스커피는 얼마나 달고 맛있을까 싶다.

우리가 찾아갔을 땐 양미리에 알이 없을 때였는데 12월이 되면 알배기 양미리가 바닷물에 둥둥 떠다닌다고 한다. 그때 다시 한번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양미리 구워 먹으려고 동해바다까지 가느냐 하겠지만 새로운 공기, 색다른 환경, 추억을 길어 올리는 맛을 찾아 떠난 길이었으니 짧은 여행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분당서울대병원 노인병내과 김광일 교수는 백세시대 금요칼럼에서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이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질까’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해 보라고 조언한다. 

집안에서 단조로운 생활만을 계속하다 보면 그날이 그날이고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큼 의미 있는 일이 없어서,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분석했다. 크게 공감했다.

한양대 교육공학과 유영만 교수의 신간 ‘2분의 1’에서는 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답게 의미 있게 살아가는 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 나이 들수록 버려야 하는 습관과 채워야 하는 습관 50가지를 제안하는데, 그중 몇 가지는 제목만 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 삶에서 절반으로 줄여야 할 습관과 두 배로 늘려야 할 습관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과식은 절반으로 음미는 두 배로, 걱정은 절반으로 긍정은 두 배로, 빠듯한 일은 절반으로 뿌듯한 일은 두 배로, 물건 구매는 절반으로 경험 구매는 두 배로, 질투는 절반으로 질문은 두 배로, 악연은 만들지 말고 인연은 두 배로, 경쟁 상태는 절반으로 경청 대상은 두 배로, 단점 지적은 절반으로 장점 칭찬은 두 배로 등이다. 하나하나 공감하며 잘 실천해 보리라 마음먹는다.

나의 책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에서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살면서 불편한 것은 버려야지 억지로 끌고 가면 오히려 다른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인간관계도, 나쁜 습관도, 오래된 앙금 같은 씻을 수 없는 감정도, 후회도 미련도 원망도, 이젠 버려도 누가 탓하지 않을 만큼 나이 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비워낸 자리에 소중한 추억을 만들 일을 채워 나가야 한다.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좀 더 바라보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말이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시간은 가는 것. 그러나 ‘늙는다, 병든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다’ 보다는 ‘성장한다, 발전한다, 익어간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별을 한다’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12월 알배기 양미리를 먹으러 다시 한번 동해바다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