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 관념을 깬다는 것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
앞 여울에 물고기 하도 많아서
마음먹고 물결 가르며 날아들려다
사람 보고 별안간에 너무 놀라서
여뀌 핀 언덕으로 되려 날아와
목 뺀 채로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가랑비에 털옷은 자꾸 젖지만
마음 외려 여울 고기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욕심 잊고 서 있다 하네.
前灘富魚蝦 (전탄부어하)
有意劈波入 (유의벽파입)
見人忽驚起 (견인홀경기)
蓼岸還飛集 (요안환비집)
翹頸待人歸 (교경대인귀)
細雨毛衣濕 (세우모의습)
心猶在灘魚 (심유재탄어)
人導忘機立 (인도망기립)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2권, 「고율시(古律詩)」
(전략) 제목으로 볼 때 이 시는 스님의 방 안에 있는 족자의 그림을 보고 쓴 제화시이고, 시로 볼 때 족자에 그려진 그림은 여뀌꽃 떨기 속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동양화를 떠올려 보면 앞 여울과 여울 속의 물고기, 지나가는 사람, 언덕은 모두 그림 속에 그려진 풍경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시상을 떠올린 이규보가 만들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뀌꽃 사이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가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시상을 끌어내고 구상하여 한 편의 시로 만든 능력이 이규보를 시인으로 만들었다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욕심 잊고 서 있다”고 생각하는 백로를, “마음을 외려 여울의 물고기에 두면서도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목을 길게 뺀 채 비를 맞으며 사람이 되돌아가기를 기다리는” 탐욕과 가식에 가득한 존재로 만든 능력은 이규보를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천재로 만든다.
이 시가 여뀌꽃 사이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를 그린 그림이라는 정태적인 화면에 입체적인 공간을 부여하고 시간의 흐름을 더하여, 정태적인 화면을 생동감 넘치는 동태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적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김종직이 ‘청구풍아’에서 “이 시는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한 듯이 사는 것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풍자의 뜻이 담겨 있다[此所謂貪夫若廉, 而人不知也, 寓諷意]”고 한 것처럼, 그동안 순수·우아·순결·고귀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백로를 탐욕에 가득한 가식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하략)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