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 전…‘개그림’으로 신하 질책한 영조, 격려시 써준 정조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 전…‘개그림’으로 신하 질책한 영조, 격려시 써준 정조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3.12.18 13:50
  • 호수 89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정조, 글과 그림 활용 탕평책… 당시 제작된 궁중서화 88점 전시

무신난 해명자료인 ‘감란록’, 궁중 행사 기록한 ‘반차도’ 등 눈길

이번 전시에서는 글과 그림을 통해 탕평책을 펼친 영조와 정조의 노력을 소개한다. 사진은 영조가 개 그림 위에 신하를 질책하는 문구를 적은 ‘삽살개’
이번 전시에서는 글과 그림을 통해 탕평책을 펼친 영조와 정조의 노력을 소개한다. 사진은 영조가 개 그림 위에 신하를 질책하는 문구를 적은 ‘삽살개’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柴門夜直 是爾之任 如何途上 晝亦若此)

지난 12월 1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는 다소 사납게 생긴 삽살개 한 마리가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영조(재위 1724-1776)가 자신이 아끼는 화원 화가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위의 문구를 더해 완성한 ‘삽살개’는 탕평(蕩平)을 따르지 않는 신화들을 질책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본분인 민생 챙기기는 뒷전이고 정쟁과 밥그릇 싸움에 골몰하는 현 정치권을 질타하는 듯해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의 즉위 300주년을 맞이해 열리는‘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3월 1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영조와 정조가 쓴 어필(御筆)과 두 임금의 의도를 반영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등 18세기 궁중서화의 품격을 보여주는 54건 88점을 선보인다. 

영조는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한 후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며 균역법 및 준천(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파내는 것)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여기서 탕평은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한다. 유교 경전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조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를 풀면 뜻이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만들지 않아야 왕도가 탕탕하고, 무리를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어야 왕도가 평평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비롯된 황극탕평도 임금이 표준을 바로 세우면 만백성이 그것을 자신의 표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도 탕평책을 펼치며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총 4부로 구성해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이루고자 활용했던 글과 그림을 소개한다. 먼저 1부 ‘탕평의 길로 나아가다’에 탕평의 의미와 의지를 전하는 서적과 그림을 전시한다. 영조는 자신의 국정 운영 방침을 널리 알리고자 서적을 간행했는데 이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소통 방식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감란록’(勘亂錄, 1729)이다. 영조는 즉위 초 온건파 소론과 함께 국정을 운영했는데 1728년 급진파 소론 등이 일으킨 무신란이 일어난다. 이때 박문수 등 온건파 소론이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후 영조는 반란이 일어난 상세한 과정과 근본적 원인을 붕당으로 돌리는 내용을 담은 ‘감란록’을 간행한다. 현재 정부‧기업 등이 배포하는 일종의 ‘해명자료’의 성격으로 조선 왕 중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정조 역시 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도 했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과거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함)했다. 이에 대한 명분을 전하기 위해 경위를 기록한 역사서 ‘명의록’을 내기도 했다.

이어지는 2부 ‘인재를 고루 등용해 탕평을 이루다’는 영조와 정조가 서화를 통해 지지 세력을 확대했던 시도를 살펴본다. 영조는 위기의 순간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초상화에 담기도 했다. 이중 균역법으로 부족한 세수를 해결하는 묘책을 내며 그의 탕평 정치에 힘을 보탠 박문수(1691~1767)의 초상화는 당대 최고의 초상 화가 진재해가 그린 것으로 38세 때 전신 초상과 60세 때 반신 초상이 나란히 걸려 주름이 깊어지고 수염이 하얘진 세월의 변화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정조는 가까운 신하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됐을 때 시로 앞날을 격려했다. 정민시(1745~1800)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써 준 시도 전시장에 나왔다. 모란, 박쥐 문양이 새겨진 고운 분홍빛 비단에 쓴 시에서 아끼는 신하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던 임금의 마음이 읽힌다.

영조와 정조는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도 글과 그림의 힘을 활용했다. 3부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다’에서는 이와 관련된 유물을 소개한다. 이중 눈길을 끄는 건 ‘효손 은인’이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게 된 후 영조에게 승정원일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록을 지워달라는 요청을 한다. 영조는 이 뜻을 받아들여 그 기록을 물에 씻어 버리고, 아울러 ‘효손’이라고 직접 쓴 글씨를 새겨 만든 인장을 내렸다. 왕의 친필이 새겨져 있는 ‘효손 은인’을 통해 정조의 효심을 살펴본다. 

마지막 공간인 ‘질서와 화합의 탕평’에서는 정조가 1795년 화성에서 개최한 기념비적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화성원행도’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화성원행도’는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질서를 이루고, 백성은 편안하게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강조한다. 또 이와 함께 소개된 ‘반차도’는 궁중 행사의 의식과 늘어선 관원들의 배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데 6000명이 넘는 인원의 역할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