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8] 유년의 소멸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8] 유년의 소멸
  •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 승인 2024.01.08 10:06
  • 호수 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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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소멸

아이가 관례를 앞두고 그날이 다가오매 상투 틀고 갓 쓰고 나면 이제 어린 시절과는 작별이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필시 땋은 머리를 자꾸만 어루만지니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섣달 그믐날 석양마저 잦아드노라면 차마 마음 가누지 못하고 필시 석양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건 올해의 햇빛이 다만 여기서 그치기 때문이다.

又如童子將冠(우여동자장관), 吉日旣逼(길일기핍), 

心中以爲冠一加則童則別矣(심중이위관일가즉동즉별의), 

必頻頻手撫編髮(필빈빈수무편발), 人情之恒然也(인정지항연야). 

除日夕陽將落(제일석양장락), 則情又不忍(즉정우불인), 

必細玩夕陽(필세완석양), 今年之日色(금년지일색), 

只有此故也(지유차고야).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48권 「耳目口心書1」


(전략) 형암(烱菴)은 한 해의 마지막 어스름이 까만 밤에 끝내 삼켜짐을 슬퍼하였고 곧이어 찾아온 새해를 부러 맞이할 마음 없는 손님처럼 데면데면 여겼다. 스스로 말하듯, 또 한 살 나이를 먹음에 올해의 빛깔을 띤 올해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어서였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오히려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들이었기 때문이요, 곤륜산을 동남쪽으로 번쩍 들어 옮겨놓을 수 있다던 그 유년의 즐거웠던 나날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말대로 얇은 종이만큼의 두께밖에 남지 않은 세밑의 짧은 밤, 다가오는 시간을 느끼고 지나간 시절을 슬퍼하는 문장들을 예닐곱 꼭지쯤 연거푸 썼다.

새해를 맞아 들뜬 아이들을 보자니 문득 소멸된 제 유년이 떠올라 또다시 소멸해가는 지금이 더욱 느껍다. 그러한 심사는 「이목구심서」의 첫머리 외에도 「신사년을 전송하는 서(餞辛巳序)」와 「제야에 전겸익의 시에 차운함(除夜, 次錢牧齋韻)」에도 고스란히 남아, 역시 젊은 날들의 글을 모은 『영처고(嬰處稿)』의 앞머리에 전한다. 그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이 한없이 그립고 안타까워, 곧 헤어질 벗에게 그러하듯 떠나가는 모습을 애써 톺아보며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유년의 소멸에 비추어보건대 남은 청춘이며 앞둔 장년의 시간들도 차곡차곡 사라져갈 것이다. 앓듯이 뒤척이는 그의 마음은 지난 한 해 빗질하며 모아둔 머리칼들을 경대에서 꺼내 불살라 버리고서야 그친다.

열두 살 아이는 또래들과 오랫동안 끌어온 격렬한 논쟁에서 비로소 패하여 돌아와서는 “처음부터 산타가 없는 줄 알았으면 그동안 그렇게 비싼 장난감을 선물해달라고 빌지 말 걸 그랬어요”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기였던 때도 그립지 않고 어른이 될 날도 설레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이 좋은데 그중에서도 한 해의 끝자락에 닿은 이즈음이 까닭 모르게 가장 즐겁다고 하다 12월 첫날 밤의 잠에 들었다.(하략)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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