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6] 조선의 시무식 ‘회례연(會禮宴)’에서 벌어진 일, “박연이 첫선 보인 우리 악기와 소리에 세종 흡족”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6] 조선의 시무식 ‘회례연(會禮宴)’에서 벌어진 일, “박연이 첫선 보인 우리 악기와 소리에 세종 흡족”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1.08 14:24
  • 호수 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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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박연에 지시한 지 9년여 만에 회례연에서 첫 연주

예조판서 “음률 정하는 건 중국 천자만의 일”… 우려 표해

국립국악원에서 재현한 세종의 회례연 ‘하늘의 소리를 듣다’ 중 한 장면.
국립국악원에서 재현한 세종의 회례연 ‘하늘의 소리를 듣다’ 중 한 장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시대에도 요즘과 같은 시무식이 있었다. 회례연(會禮宴)이다. 임금이 신하들 세배를 받고, 신하는 정무 보고 하고, 다함께 궁중의례와 음악, 춤을 즐기는 잔치였다. 세종은 1419년 1월 1일(음력), 왕위에 오른 첫해 열린 회례연에서 아버지 태종에게 세배를 올렸다. 

세종은 이른 아침 면류관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 쪽에 예를 올렸다. 그리고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세배를 받았다. 새해 인사에는 승도들과 일본 사신, 아랍 사신들도 참석했다.

세종은 태종 내외가 있는 수강궁으로 이동해 신하들과 세배를 드렸다. 새해 선물로는 의복과 안장을 갖춘 말(鞍馬)을 준비했다. 세종이 부왕께 장수하시라는 수주(壽酒)를 먼저 올렸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태종이 일어나 춤을 췄고, 종친과 신하들도 어울려 춤을 추면서 연구(聯句·몇 사람이 모여 구를 이어 가며  지은 시)를 즐겼다. 

◇장영실도 우리 소리 창작에 참여

세종 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회례연이 열렸다. 재위 15년째인 1433년 새해에 있었던 그날 행사에서 궁중음악의 일대 혁신이 있었다. 바로 우리만의 악기와 소리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중국에서 들여온 당악(唐樂)이 연주되곤 했다.

그날도 세종은 다를 바 없이 중국 황제에 대한 예를 올리고 근정전에 나아가서 왕세자의 절을 받고 여러 신하, 일본 등 외국 사신들의 새해 인사를 받았다.  

세종은 이미 오래 전에 ‘악학별좌’(樂學別坐) 박연(1378~1458년)에게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이날 회례연에서 박연이 첫 연주를 선보였다. 연주된 음악은 태조대왕의 거룩하고 어진 마음이 무궁함을 기리는 곡과 태종이 어지러운 난을 평정한 공을 상징하는 곡이었다. 박연과 예인들 그리고 과학자 장영실까지 참여해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은 연주를 감상한 직후 토론의 자리를 만들었다. 이조판서 신상이 박연에게 낯선 악기에 대한 설명을 지시했다.    

•박연 보시기에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은 차례대로 순, 탁, 요, 탁이라고 하고 뒤에 놓여있는 것들은 음, 아, 상, 독이라 하는데 주로 춤과 사람의 걸음을 절제하게 합니다. 

•세종 그러하도다. 새로이 제작한 악기 덕분에 합주가 더욱 굳건하고 장엄해졌도다. 이제 악곡에 대해서 격의 없이 토론해 보시오. 예조판서부터. 

•예조판서 악곡이 새로운 것은 새로 제작한 악기들로 일어난 것인 바 편경 모양의 제도와 성음의 법은 어디서 취했는지 궁금하오. 

•박연 모양과 제도는 중국에서 전해온 편경에 의한 것이나 그 소리는 신이 스스로 12 율관(律管)을 만들고 합하여 이루었습니다. (율관: 음악에 쓰이는 율, 즉 기본이 되는 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댓가지(竹管)이다)

•예조판서 예로부터 음률을 정하는 것은 천자의 일이고, 제후의 나라에서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거늘, 중국의 음을 버리고 스스로 율관을 만든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박연 역대로 음률을 마련할 때 복식 기장을 기준으로 합니다. 소리의 기본이 되는 황종음은 기장을 90개 늘어놓은 길이의 대나무, 즉 황종율관(黃鍾律管·12율의 기본이 되는 율관)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기장의 크기가 중국과 다르옵니다. 이런 연유로 중국의 음률을 버리고 우리 땅에서 나오는 기장을 기준으로 우리의 소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습니다. 

•예조판서 그렇다면 악학별좌는 감히 중국의 음률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박연 굳이 따진다면 우리의 기준으로는 그렇지요. 

◇왕비전서 여자들만의 잔치 열려

•세종 ‘우리의 기준’이라, 허허. 박연이 지금 우리의 기준이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다. 헌데 사관은 어찌하여 이 말들을 기록하지 않고 붓을 멈추고 있는 것인가.

•사관 전하께 감히 아뢰옵니다. 지금 대국의 질서와 예법을 부정하고, 또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면 역사에 큰 누가 될 것이옵니다. 

•세종 역사에 누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느냐.

•사관 소신은 성상께 큰 화가 미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옵니다. 

•세종 참을 참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 앞에 더욱 두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는 네 직분에 충실해 모든 것을 소상히 기록하라. 

•사관 분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전하.

•세종 박연의 뜻에 대해 좌상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소. 

•맹사성 신 맹사성 삼가 아뢰옵니다. 무릇 성악의 조화는 예로부터 어렵게 여겼던 일이옵니다. 박연은 지난 몇 년간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율관을 제작하였습니다. 오늘의 소리를 들어보니 박연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리고 소신의 부끄러운 견문으로는 오늘 들은 편경 소리가 지극히 조화로운 줄 아뢰옵니다. 

•세종 음. 편경을 연주하는 악생의 말을 직접 듣고 싶구나. 

•악생 소신들은 그동안 봉상시(奉常寺·종묘의 제향과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에서 간직해온 12관보만 배웠을 뿐 음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와경(瓦經·기와로 만든 편경)을 쓰고, 좀 더 그 수요를 갖추지 못하여 소리가 거칠고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허나 새로 편경을 만들어주시니 나머지 악기들과 소리 또한 새로워졌습니다. 

•세종 허면 네가 편경의 소리를, 그 조화로움을 들려주겠느냐. 

•악생 네 지극히 당연하옵니다. 전하.

세종은 음악 분야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악기와 소리를 창조해냈다. 여자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하고, 연회 음악까지 손을 보도록 한 세종의 위대함이 새삼 느껴진다. 이 날 왕비전인 중궁전에서 여성을 위한 잔치가 따로 베풀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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