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내의 지우개
[시] 아내의 지우개
  • 관리자
  • 승인 2024.01.15 11:18
  • 호수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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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지우개

박민순 시인/경기 오산
박민순 시인/경기 오산

서랍을 여니

구석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지우개

본래 네모였을 텐데

세월의 무게 지우느라

둥글둥글 모서리 닳았다

 

손바닥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차 하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통통 튀어 오른 지우개

지구의 자전 속도보다 더 빠르게

싱크대 앞으로 굴러가더니

설거지하던 아내의 발뒤꿈치를

툭 치고는 이내 멈추어 섰다

 

아직도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여

지우고 또 지우는 나를

오디처럼 탱글탱글 여문 눈빛으로

곱게 흘기는 아내

 

내 삶은 연필과 지우개만으로도

자유로운 삶이었지만

아내는 내게서 떨어져 나온

수북한 지우개 똥을 치우느라

물기 마를 새 없는 행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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