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8] 조선의 군대, “무기·갑옷·군량… 스스로 챙겨”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8] 조선의 군대, “무기·갑옷·군량… 스스로 챙겨”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1.22 13:54
  • 호수 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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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세 노인이 점호 받자 세종이 70세로 낮춰   

임진왜란 당시 군인들 연일 술에 취해 지내

정조는 호위부대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사진은 수원 화성 행궁에 주둔했던 장용영을 재현한 것이다.
정조는 호위부대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사진은 수원 화성 행궁에 주둔했던 장용영을 재현한 것이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군에 간 아들이 부모에게 “총 살 돈을 부쳐 달라”는 개그가 돈 적이 있었다. 조선의 군대에선 이것이 사실이었다. 조선 군인은 무기 뿐만 아니라 갑옷도 각자 알아서 챙겨야 했다. 

요즘의 군대는 징집영장을 받으면 머리 깎고 훈련소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받고 이후 긴 세월 군 복무를 한다. 무기와 군복, 음식 등 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군에서 지급 받는다. 명령 받은 휴가를 제외하곤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친지들도 만날 수 없다. 

조선의 군대 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1년에 몇 개월 씩 한양이나 지방 군영에서 복무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 기간에 자신이 먹을 음식과 의복도 알아서 준비한다. 전쟁터에 나가서 갑자기 죽거나 다쳐도 별다른 보상도 없었다. 

경국대전에 나오는 조선의 군역은 간단하다. 양반을 비롯한 일반 백성이 징집 대상이다. 기한은 16세부터 60세까지였다. 양반이라서 군역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고, 관직에 있거나 성균관, 향교 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만 면제가 됐다.  

◇돈 받고 대신 군역 치러 

요즘도 군에 가지 않으려고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는데 조선에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별 보상도 없이 1년에 몇 개월씩 낯선 곳에 가서 생활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징집 대상자들은 본인이 가는 대신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사서 복무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수전패(受田牌)이다. 이는 불법은 아니다. 

고려시대 공양왕 때 처음 만들어진 수전패는 과전을 지급 받고 그 대가로 군역을 치르는 중앙군이다. 주로 관직이 없는 양반가 자제들이 주류를 이뤘으며 5결 정도의 토지를 받는 대가로 번갈아 가면서 한양에 올라가서 번상을 했다. 번상(番上)이란 지방의 군사가 군역(軍役)을 치르기 위해 번(番)의 차례에 따라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수전패들은 한양에서 궁궐을 지키거나 명나라 사신이 오면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재밌는 일도 있었다. 몸도 가누기 힘든 82세 노인이 점호에 응한 것이다. 1429년 9월 18일 수전패의 군기점고를 하던 병조참관 조종생이 세종에게 희한한 보고를 올렸다. 경기도 양성에서 82세 노인이 점고(點考·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며 사람의 수를 조사함)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종생은 세종에게 서 있기조차 힘든 노인을 점고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세종은 바로 승낙하고는 앞으로 70세 이상의 노인은 점고에서 뺄 것을 지시했다. 

조선의 군대 중 오늘의 잣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술이다. 이순신 장군(1545~1598년)의 ‘난중일기’에는 군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1593년 9월 10일 일기에 “공문을 적어 탐후선에 보냈다. 해가 저물어 우수사의 배에 가서 내가 머문 곳으로 오기를 청하여 방답 첨사와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고 씌어 있다. 

◇장병들 씨름으로 스트레스 풀어  

1596년 3월에는 이런 내용의 일기도 있다. 

“아침에 마셨는데 취하여 쓰러져 또 마시고 그래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다. 어떤 이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마셨다. 작별의 술자리도 잦다. 이렇게 마시니 술병이 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일을 못할 때도 있었다. 전날 저녁에 작별 술잔을 나누어 대청에서 그대로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또 다시 작별의 술잔을 들기도 했다.”

술만 마신 게 아니라 바둑과 장기, 씨름을 즐겼다. 계급이 높은 이가 생일을 맞으면 생일잔치도 성대하게 치렀다. 장병들 사이에선 씨름이 일반적이었다. 씨름판을 벌이면 등수를 매겨 그에 맞게 상도 줬다. 장병들은 한바탕 씨름으로 전장에서의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군대가 일대쇄신을 꾀한 계기는 임진왜란과 정묘·병조호란 등을 겪으면서다. 외세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셈이다. 

정조(조선 제22대 왕·1752~1800년)는 ‘장용영’이란 호위부대를 조직해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다. 1793년에 조직된 이 부대는 금군(禁軍·조정과 임금을 지키는 군사)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존의 5군영(五軍營)을 능가하는 위세를 가졌다. 5군영은 조선 후기 한양과 주변을 방어하던 5개의 중앙 군영으로 훈련도감을 비롯해 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을 말한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군대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지난 문재인 정부 때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양측의 GP를 철수하기로 했는데 이때 북한 측 GP(감시초소·Guard Post)의 지하시설 파괴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패스해 북 GP의 전투 능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북을 그대로 믿고 우리 측 GP만 철수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오늘날의 군대도 허술하기는 짝이 없어 국민이 맘 놓고 잠을 이루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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