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치매센터 치매극복 희망수기 1] 우리 결혼하자! 응!
[중앙치매센터 치매극복 희망수기 1] 우리 결혼하자! 응!
  • 중앙치매센터
  • 승인 2024.01.22 14:04
  • 호수 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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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치매환자 역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17년 9월 치매국가책임제를 선포하고 전국에 256개의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했다. 이렇게 시작된 치매안심센터는 어느덧 치매 관련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사회 핵심기관으로 성장했고 지역주민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백세시대는 보건복지부 중앙치매센터가 공모해 수상한 ‘치매극복 희망수기’를 연재물로 싣는다. 


우리 결혼하자! 응!

최우수상  노옥란

고성군 치매안심센터로부터 가족 지지 프로그램에 참석할 것을 권유받았을 때, 별로 흥미롭지 않았고 치매를 이미 앓고 있는데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될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많이 망설였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석해 보기로 했다.

치매 환자를 직접 돌보고 있는 가족들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참석했지만 서로 어색했고, 어디까지 이야기가 될지, 처음에는 다른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려고 참석했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 이어 일주일에 두 번씩 모이다 보니 얼굴도 익혀지게 되고, 인사도 대화도 많아져 사사로운 이야기도 하게 되면서, 깊은 속사정도 이야기하게 되어 각자의 사정도 잘 알게 됐다.

솔직히 나의 남편은 치매 5등급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한 사람이라 돌봄의 어려움을 몰랐고, 집안일도 도와줘 내가 직장에 다닐 때 걱정 없이 지냈기에, 와상 치매 환자분이나 가족과 지인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시는 중증 치매환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가족 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구성원들의 개인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한 걱정과 함께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는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이야기도 하게 됐다. 또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치매라는 질병에 대해서도 배우고,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원예, 도자기, 생활 공예 등의 프로그램으로 나의 마음을 힐링시키는 시간이 됐다. 

치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니 공부도 더 하고 싶어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게 됐고, 사례집이나 치매안심센터 가족 카페에 비치된 치매 관련 서적 등도 읽기 시작하면서 가족 모임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치매안심센터와 치매환자 가족 모임의 도움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내왔고, 간혹 남편이 치매 증상으로 실수할 때만 걱정과 우울함이 몰려왔을 뿐 나의 직장생활이나 친구와의 관계 등 원만한 사회생활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시련

2020년 4월 30일, 남편이 샤워 중 뇌출혈로 인해 쓰러져 4~5일 만에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의 식물인간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강릉아산병원에서 중환자실 입원 치료를 받고 집에서 좀 더 가까운 속초의료원으로 옮겼다. 

속초의료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흐느적거렸던 신체가 조금씩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떤 날은 나를 동생이라 부르고, 어떤 날은 자기와 결혼해 달라는 등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당황함과 좌절이 밀려왔다. ‘나에게 닥친 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무거운 마음을 달래보며 치매 가족 구성원들의 일상을 생각해 보게 됐다.

치매환자 가족 지지 모임에서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힘든 시간이 찾아오니 내가 진심으로 구성원들의 아픔을, 상처를, 외로움을 제대로 이해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몸은 고달파졌지만, 나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치매 가족 구성원들도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위로와 안정을 찾게 됐다.

환자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자는 자기애가 발동했다. 치매환자 가족 지지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옷을 깨끗하게 다림질해 한껏 멋을 부려본다. 그러면 기분도 좋아지고 표정도 밝아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손자와 함께하는 간호

조금 떨어진 동네에 사는 아들 내외는 생업 관계로 바빠 아버지의 병간호를 도와줄 형편이 못 된다. 나 또한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전적으로 돌보기에는 체력의 한계가 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21살 손자가 공부하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할아버지의 간병을 도와주고 있다. 목욕, 기저귀 교환, 밖에 나가 운동하기, 식사 등을 도와주는데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직 할아버지 대변처리까지는 무리인지 내가 남편의 대변을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손자가 “할머니, 냄새나고 더럽지 않아요? 손에 똥이 묻었어요!”라고 한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할머니는 냄새나거나 더럽지 않아. 할머니와 너를 쳐다보는 소 같은 큰 눈망울 속에는 불안함과 사랑, 감사가 담겨있단다. 할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 칭찬과 응원을 보내주자꾸나”하고 대답해줬다. 

손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두 분을 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고 한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편마비가 오고 심해진 치매 증상으로 잠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나의 곁에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 남편이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남은 시간 더 아프지 않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내가 힘이 있는 한 남편을 정성껏 돌보며 활기차게 생활해 좋은 기억만을 내 자녀와 손주들에게 남기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그동안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준 치매안심센터와 치매환자 가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매일 나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내 남편! “여보, 다시 태어나도 난 또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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