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9] 사육신 가족, 그 후 어떻게 됐나 “남자는 모두 죽임 당하고, 여자는 종이나 첩으로”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9] 사육신 가족, 그 후 어떻게 됐나 “남자는 모두 죽임 당하고, 여자는 종이나 첩으로”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1.29 14:52
  • 호수 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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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동생 아내 “남편과의 혈서는 옛일이라 잊었다”

성삼문 아내와 딸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돌아갔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의 한 장면.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의 한 장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조선 6대 왕·1441~1457년)을 복위하려다 사전에 들통이 나 세조(조선 7대 왕·1417 ~1468년)에게 죽임을 당한 6명의 충신을 말한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세조와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김질이 장인의 설득에 못 이겨 거사 직전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관련자 500~800명이 처형 또는 학살됐다.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종이나 노리개, 첩 등 공신들의 전리품인 양 나누어졌다. 사육신 중 박팽년과 하위지 후손만이 살아 내려오고 있다. 사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 중에 이개의 종증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있다. 유응부는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향교 유생과 정을 통하기도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음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성삼문의 아내와 딸은 운성부원군 박종우(?~1464년)에게 돌아갔다. 박종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운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호조판서,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사대부의 아내와 딸이 하루아침에 노비의 신분이 된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남편과 아버지의 동료이자 원수의 집안에 보내진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재혼한 경우이다. 박팽년의 동생 박대년의 아내 윤씨가 그런 경우다. 감옥에 갇힌 박대년은 죽기 전 정강이의 피로 서로 잊지 말고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자는 글을 써서 아내에게 보냈다. 이 글을 받은 아내 윤씨는 짧은 시로 화답했다. 남편이 처형 당하고 윤씨는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무신 봉석주(?~1465년)에게 노비로 주어졌다. 

봉석주가 윤씨의 미모에 반해 유혹하니 그녀는 남편과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좋은 말을 보내주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를 맞이한 봉석주가 “죽은 남편의 혈서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윤씨는 “옛일이라 잊어버렸다”고 대꾸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이 일을 적으며 “통탄할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삼문의 동생 성삼고의 아내 김씨는 이웃에 사는 남자와 정을 통했고, 안잉의 아내 역시 남편이 멀리 유배를 떠나자 재산을 팔아치우고 향교에서 글을 배우는 학생과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남편이 서찰을 보내 이혼을 요구하면서 아내가 뉘우치지 않는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천한 아전의 아내보다 못해

사관은 하찮은 아전의 아내가 남편과 자식이 죽자 목매달아 숨졌는데 사대부 여인들이 정조를 잃었다고 질타했다. 사관의 심경이 실록 ‘사관은 논한다’라는 부분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아들이 아비를, 신하가 임금을, 아내가 지아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 편안할 때나 큰 변고가 있을 때나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역적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적의 처첩들은 남편과 아들이 죽었는데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집안이 몰락하여 천한 신분이 되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엎드려 죽거나 가족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도리를 무시하고 예법을 어지럽히니 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의 신분이 천하게 된 다음에야 본심이 드러난 것이니 불쌍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일이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한 아전의 아내만도 못하도다. 대의를 위해 몸을 버리고 가족을 저버리는 것은 마땅히 군자와 대인의 일이나 여자와 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히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편으로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변심이 부끄럽고 비난만 받을 행동일까. 임금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내와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인가. 

충절과 정조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조선에서도 가정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닥쳤을 때 평생 한 남편만을 섬기는 일부종사(一夫從事)는 찾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할 진대 시대가 바뀐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로 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닐까.

사육신은 숙종~영조 대에 이르러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됐다. 그들의 묘는 노량진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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