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0] 이름은 빌려와도 괜찮다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0] 이름은 빌려와도 괜찮다
  •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선임연구원
  • 승인 2024.02.02 11:05
  • 호수 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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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빌려와도 괜찮다

내실에 부끄러운 점이 없다면 이름은 빌려와서 붙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

實之苟無所媿(실지구무소괴), 名或借儗而無嫌(명혹차의이무혐)

- 조귀명(趙龜命), 『동계집(東谿集)』 「왜려설(倭驢說)」


얼마 전 서울 모처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 선배가 해 준 이야기이다. 선배가 사는 단지와 바로 옆 단지는 여러모로 조건이 비슷하고 집값도 비슷했다고 한다. 그런데 옆 단지가 이름을 ‘고급스럽게’ 바꾼 뒤로 집값이 훌쩍 뛰어버렸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배 단지의 주민들이 우리도 바꾸자며 들고 일어나서 반상회와 ‘주민단톡방’이 조용할 날이 없다고 한다.

요즘 전에 없이 길고 화려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자주 보인다. 지역명과 건설사 브랜드명 사이에 ‘퍼스트’, ‘센트럴’, ‘프레스티지’, ‘팰리스’, ‘로얄’ 등과 같은 고급스러운 수식어를 몇 겹으로 채워넣은 거창한 이름들이다. 많게는 총 25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하고, 한편에서 규제가 필요하다는 여론도 있다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릴적 개그프로에서 들었던 ‘서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이 생각난다. 자식이 요절할 운명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장수를 위해 지어준 이름이다.

 「왜려설(倭驢說)」에서 유생 하징은 자신이 말을 타고 서울로 올 때 있었던 일을 조귀명에게 말해준다. 하징의 말은 체구가 작아 말인지 나귀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700리 길을 사람을 태우고 4일만에 주파할 정도로 훌륭한 말이다. 오는 길에 사람들이 말이냐 나귀냐 하도 묻자 장난기가 발동한 하징은 일본에서 들여온 왜나귀라고 답하였고, 이에 혹한 사람들이 큰돈을 주고서라도 사겠다고 달려들었다. 하징은 결국 거짓이었음을 실토하였고, 사람들은 실망하여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이 이야기를 조귀명에게 하면서 하징은 내실은 보지 않고 이름에 속아넘어가는 세태가 심각하다며 한탄을 한다. 조귀명은 한편으로는 수긍하면서 한편으로는 다소 독특한 의견을 제시한다.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천리를 가는 능력이 있다면 오추(烏騅)나 적토(赤兎)라고 이름을 붙여도 되고, 삼만리를 가는 능력이 있다면 녹이(綠駬)나 황도(黃駼)라고 붙여도 된다. 어찌 특별히 왜나귀라는 이름 뿐이겠는가. 내실에 부끄러운 점이 없다면 이름은 빌려와서 붙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추, 적토, 녹이, 황도는 모두 전설적인 명마들이다. 조귀명은 어떤 말이 정말 뛰어나다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명마의 이름을 붙여도 괜찮다고 말한다. 왜일까. 하징의 말은 좋은 말이었다. 누군가 ‘왜나귀’라는 이름에 속아 샀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손해볼 일이 없다. 파는 쪽의 입장에서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속였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름에 속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경우이다. 하징의 속임수는 이름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속임수였으며, 조귀명은 이를 사실상 속임수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속임수를 권장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지만, 그가 중시한 것은 이름에 상관없이 내실을 기하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와 관련된 또다른 이슈는 부실시공이다. 유명 건설사의 이름을 걸고 만들어진 아파트의 철근 누락 사실이 대거 발각되었다. 건물의 뼈대에 해당하는 철근이 누락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건설사 브랜드명에 ‘순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덧붙였다. 조롱을 담은 이 이름이 그 어떤 거창한 이름보다도 내실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귀명은 같은 글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진짜 속임수는, 오로지 시장에서 채찍에 치자물과 밀랍을 발라 5만금에 파는데 한 번 치면 부러지는 그런 것이다.

치자물은 노란색이고, 밀랍은 매끄럽고 윤기가 난다. 치자물과 밀랍을 바른 이 물건의 이름은 아마도 ‘황금채찍’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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