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0] 조선에도 여론조사가 있었다, 세종 “백성의 고통을 무시하는 세금 징수에 유감”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0] 조선에도 여론조사가 있었다, 세종 “백성의 고통을 무시하는 세금 징수에 유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2.02 13:19
  • 호수 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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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이란 새로운 세금제도 시행에 앞서 국민 뜻 물어

5개월 간 17만여명 참여… 고위직서부터 가난한 이까지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왕이 곧 국가’인 전제주의(專制主義) 체제의 조선에 국민의 뜻을 묻는 여론조사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 세종(조선 제4대 왕·1397~1450년) 때의 일이다. 세종은 새로운 세금제도를 시행하기에 앞서 이 제도가 백성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좋은 것인지, 백성들에게 좋지 않다면 어떤 부분이 그런 지를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답게 백성을 국정 운영의 최우선 순위에 둔 것이다. 

조선은 고려의 세금징수 방법을 이어받았다. 전국의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고 징수할 곡식의 양을 미리 정한 후에 관리가 직접 수확량을 확인해 최종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관리와 지방유지와의 결탁으로 인한 부정의 소지가 많고, 농민들도 이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지곤 해 새로운 세금징수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공법(貢法)이다. 공법은 중국 하(夏)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농민 한 사람에게 토지 50무((畝·1묘는 약 30평)씩 지급하고, 그 중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5무의 수확량을 세금으로 거두는 정액세제였다. 쉽게 말해 풍년이 들던 흉년이 들던, 게으름을 피웠던 열심히 했던지 간에 정해진 만큼의 세금을 내면 됐다.

이 새로운 제도에 대해 지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렇다면 과연 농민에게는 이로운가. 세종은 고민 끝에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법에 관해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과거 시험 문제로 내기도

1427년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문과 시험문제로 공법에 관련된 내용을 출제했다. 출제 의도와 관련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길게 말했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큰 기업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우러러 조종의 훈계를 생각하여 융평(隆平)의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대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와 공부(貢賦·나라에 바치던 물건과 세금을 통틀어 이르는 말) 만큼 중한 것이 없다. 토지 제도는 해마다 조신을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여 적중을 얻기를 기하였다. 간혹 사자로 간 사람이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지 아니하여 나는 이를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맹자는 말하기를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구분과 분배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은 경술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하여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이를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세종은 신하와 유생들의 의견을 참고한 후 최종적인 시행은 백성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판단해 여론조사를 지시했다.

1430년 공법에 관해 백성의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가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에 걸쳐 실시됐다. 

당시 세종실록을 보면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한양 안의 전직 각 품관과 각 도의 관찰사·수령 및 품관부터 여염의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찬반 의견을 물어서 아뢰게 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60여년 논쟁 끝에 정착 

그해 8월 10일 호조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해 9만8657명이 찬성, 7만4148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할 때 거의 전 백성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찬반 상황을 지역별로 기록할 정도로 조사가 충실했다.  

찬성이 2만 명 이상 많으므로 결국 공법을 시행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듯 했지만 이후에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반대하는 쪽은 주로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과 이해관계가 얽힌 관료들이었다. 고정세로 바뀌면 딴 주머니를 찰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 큰소리를 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1440년 9월 3일 경상도 백성 1000여명이 신문고의 전신인 ‘등문고’(登聞鼓)를 치며 공법의 중지를 요구한 것이 대표적이다. 세종은 이 같은 난감한 상황에서도 이를 권력의 힘으로 막지 않았고, 해결 과정에서 누구 하나 처벌을 하지도 않았다.

결국 공법은 시범 실시와 폐지, 재시행과 중단, 보완 등을 거치면서 1489년 함경도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조선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무려 60년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논쟁과 토론, 여론조사와 시위 끝에 정착을 한 것이다.

조선에 공법이 자리를 잡는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세종과 조선의 백성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국민 못지않게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인내력도 강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세종은 역대 국가 지도자 중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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