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1] 위선을 경계하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1] 위선을 경계하며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4.02.26 10:19
  • 호수 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선을 경계하며

패랭이꽃[石竹花]

고상한 대나무인 양 마디 닮았고

어여쁜 계집애처럼 꽃도 폈지만

흩날려서는 한 가을도 못 견디니

대나무라 한 것은 분수 넘는 짓 아닌가.

節肖此君高 (절초차군고)

花開兒女艶 (화개아녀염)

飄零不耐秋 (표령불내추)

爲竹能無濫 (위죽능무람)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1권 「고율시(古律詩)」 <패랭이꽃[石竹花]>


2023년을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 적반하장(賊反荷杖), 남우충수(濫竽充數) 등이 선정되었다. 견리망의가 눈앞에 이익이 보이거나 이익을 보면 의리를 저버린다는 뜻이고, 적반하장이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말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되려 나무란다는 뜻이며, 남우충수가 피리를 불 줄 모르는 악사로 숫자를 채운다는 말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니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이 세 사자성어는 모두 강한 현실 비판 특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행태를 비판하는 말이다.

지나온 시간과 세태를 반추해 보면 언제나 후회나 미련이 남고 아쉽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기는 쉽지 않다. 특히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의 선정이 지난해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성찰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정된 사자성어가 비판적인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사자성어가 모두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문제다.

그런데 이 사자성어를 2023년 우리나라의 주된 사건에 견주어 보면 아무래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일반 국민이라기보다 사회 지도층 인사, 소위 말해 고위층 인사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회 지도층이라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겠지만, 세상의 큰 부조리가 대체로 가진 사람, 있는 사람, 높은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권력과 부귀를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고, 2023년의 우리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만큼 큰 도덕성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하는 사회 지도층에 놓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은 사회가 고도화되고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된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사회 구조의 단점이 보완되고 고도화되고 발달된 사회에서 국민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능력과 함께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 국민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은 현재 또 미래에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규보의 <패랭이꽃[石竹花]>이란 시를 보면 사회 지도층 인사의 위선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볼 수 있다. 시의 제목으로 사용한 패랭이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패랭이꽃이 염치없이 분수 넘치게 대나무[竹]라는 이름을 빌려 썼다고 비판한 것을 보면 분명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누군가의 위선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규보는 ‘절(節)’자를 사용하여 패랭이꽃이 대나무의 마디(절개)를 닮았다고 했는데, 그가 같다고 하지 않고 닮았다[肖]고 한 것은 패랭이꽃의 마디(절개)가 결코 대나무와 같지 않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두 번째 구에서 이규보는 이런 패랭이꽃이 어여쁜 계집아이처럼 꽃도 피웠다고 했지만, 다음 구를 보면 그 꽃은 대나무와 같이 네 계절을 두루 견디는 꽃이 아니라 고작 가을 한 계절도 견디지 못하고 날려버리는 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규보는 마지막 구에서 패랭이꽃[石竹花]이 대나무라는 명칭을 이름에 넣은 것이 분수에 넘친 짓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닮은 패랭이꽃의 마디(절개)나 어여쁜 계집아이 같은 패랭이꽃의 꽃송이는 모두 겉모습만 흉내 낸 위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규보가 비판한 것이다.

이규보가 패랭이꽃을 비판한 것처럼 명칭과 실상이 부합하지 않을 경우, 대상은 언제나 비판받게 된다. 특히 그 대상이 사회 지도층일 경우, 더 나아가 그 사회 지도층 인사가 위선에 가득할 경우 비판의 강도는 더 커진다. 사회 지도층 인사라면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신이 그 자리에 설 능력과 도덕성을 갖추었는지. 자신의 행위가 탐욕을 가린 위선이 아닌지. 스스로 정말 그 자리에 부끄럽지는 않은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는다. 그 시간이 지나고 얼마나 많은 패랭이꽃이 세상에 피어날지 모르겠지만, 패랭이꽃은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반드시 비판받는다. 그러니 자리를 탐내다가 비판받기 보다는 조용히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