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작은 것이 아름답다 / 김동배
[백세시대 금요칼럼] 작은 것이 아름답다 / 김동배
  •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 승인 2024.02.26 10:55
  • 호수 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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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배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노년기에는 소소한 것에서

아름답고 귀중한 가치 발견 가능

자연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그 중요성을 잊을 때가 많아

풀 한 포기에서 창조의 신비 느껴

50대 중반에 몸이 좀 비만해져서 일주일간 단식훈련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20여 명이 모여 물, 소금, 감식초, 백년초 등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료만을 섭취하며 지냈다. 

틈틈이 건강 강의와 명상의 시간도 있었다. 이틀 지나니 배고파지기 시작하고, 사흘 지나니 어지럼증 등 약간의 명현현상이 나타나고, 나흘째부터는 몸과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도 맑아지고 허기지기는커녕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났다. 

퇴소할 때 6kg이 빠졌지만 며칠 더 단식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하는 분의 권유대로 집에 와서 하루 동안은 연한 된장 국물을 조금씩 마시다가 다음 날부터 미음과 죽을 먹고 사나흘 후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됐다.

일주일 굶다가 처음 된장국물로 혀를 축일 때의 그 신비스러운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량의 국물이 목을 타고 위로 내려가서 위에 연결되어있는 신경을 타고 생명의 기운이 온몸의 말초신경으로 서서히 확∼ 퍼지는 느낌! 

열대지방에서 오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우기가 돌아와 빗물이 흘러드니 말라비틀어졌던 식물들이 서서히 소생하는 현상 같았다. 특별하지도 않은 소량의 영양분이 중앙에서 말단으로 전달되면서 전신에 훈훈한 에너지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아, 한 모금의 된장 국물로도 이렇게 힘이 솟아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음식을 무분별하게 먹어왔던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한 모금의 된장국물이 최고의 영양식으로 느껴졌다.      

퇴소식 때 “앞으론 배고픔을 즐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공언했지만 작심삼일이었다. 얼마 못 가 요요현상도 나타났다. 단, 성과라면 식이요법에 관심을 갖고 소식(小食)을 좀 해보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특히, 된장국물의 그 특이한 체험을 통해 인생에 있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내 나름의 행복의 원리를 터득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원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말은 사회경제학자인 E. F. 슈마허가 쓴 책의 제목이다. 그는 크기와 속도의 효율성을 지상과제로 삼아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지향하는 현대 경제학에 제동을 걸고 작고 소박한 인간중심의 새로운 경제학을 모색하면서 인류가 상생공존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유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역작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겐 필독서다. 경제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이 어구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표현할 때 많이 활용된다. 노년기에는 소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서 오히려 아름답고 귀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그 중요성을 잊을 때가 많다. 이제 봄의 숲은 동토가 녹으면서 겨우내 숨어있던 새와 벌과 나비에게 생존과 번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갖가지 색깔의 꽃은 봉오리를 터뜨리면서 그 화사한 자태를 한껏 자랑할 것이다. 

당연해 보이는 자연 질서 안에서 계속 재창조되는 생명체의 순수함과 강인함이 경이롭다. 거대한 히말라야나 그랜드캐니언에서 느끼는 장엄함과는 달리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서도 위대한 창조의 신비를 음미하며 남모를 희열을 느낀다. 노년기는 영문학자 장영희가 “순수를 꿈꾸며”라는 짧은 번역 시에서 읊었듯이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는” 통찰력이 필요한 시기다. 

따뜻한 봄기운에 힘입어 마음을 활짝 열고, 이젠 흘려보내야 하는 것과 여전히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것을 분별해야 하겠다. 나이 들어 감격할 일이 줄어들수록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보자.  

작은 것에 감사한다. 감사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감사가 일상화된다면 감사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마음 저변에는 그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믿음과 희망이 생긴다. 

나이 들면 건강, 경제 등 생활 전반에 불만의 조건이 늘어나는데,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감사는 평온, 기쁨, 관용 등 보석 같은 미덕을 수반한다. 

달고 쓴 인생 경험을 잘 녹여 이걸 감사 에너지로 전환하여 후손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전수할 수 있다면 노년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말하는 늙음에 대한 예찬은 이러한 감사 생활에서 단서를 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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