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1] 이승만 재평가 “과연 남북 분단 고착화의 장본인인가”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1] 이승만 재평가 “과연 남북 분단 고착화의 장본인인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2.26 13:19
  • 호수 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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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대남 전략에 넘어간 좌파 역사학자들, 그릇된 역사 가르쳐   

운동권 세력, 군부독재 타도 외치면서 이승만의 업적까지 폄훼

소련의 야욕과 소련의 협조를 기대한 미국의 단견적 정책 결과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다큐 영화 ‘건국전쟁’을 계기로 이승만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70년간 누구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던 역사적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동안 조작되고 호도되고 왜곡됐던 사실들이 이번 영화로 인해 새롭게 밝혀지고 해명되는 가운데 그의 업적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법대, 미국 일리노이대학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한 최명(83)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란 책에서 이승만에 대한 옳지 않은 평가는 운동권과 좌파 역사학자들의 소행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최 교수는 초등학교 시절에 6·25를 겪었고 대학 중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그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듯이 모든 위대한 정치가에게도 공과 과가 있다고 했다. 한 예가 모택동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평가이다. 모택동은 공산 혁명을 완성시킨 큰 공이 있는 반면 ‘대약진’과 ‘문화혁명’이라는 엄중한 과오도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1981년 모택동에 대해 “공적이 첫 번째이고 과오(착오)는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에 따라 오늘날 중국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 초상화가 높이 걸리게 됐다.

최 교수는 이승만 평가에 대해 “건국이라는 그의 공적이 첫 번째이고, 장기 집권에 따른 과오는 두 번째”라고 했다. 그런 즉 이승만의 과오만 부풀리고, 건국에 기여한 사실을 덮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정책 책임도 

이승만에 대한 비난 중 대표적인 것이 남북 분단을 고착화한 장본인이라든지, 친일적이고 친미 사대주의자라는 것 등이다. 이것은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아니다. 크게 보아 여기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좌파 민중사관 역사학자들의 역사 왜곡에서 연유된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학생 중심의 반독재투쟁은 민족 해방 노선과 민중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김일성의 소위 주체사상을 동경했다. 미 제국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다. 이들 세력의 힘은 강했다. 두 정권이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세력 역시 강하고 영향력이 컸다. 

그들은 군부독재의 타도를 외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의 업적도 폄훼되기 시작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서 나타났듯이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는 이승만에게 남북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또 그가 남한 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통일국가 수립을 방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좌파 민중사관의 역사학자들은 북한의 대남심리 전략에 휘말려 순진무구한 학생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책임도 크다. 그 정부들이 햇볕정책이니 뭐니 할 때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이 혼란에 빠졌고 좌파 집단이 양산됐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이를 두고 이승만의 정권욕이 표출된 것이라고 매도하든가, 나아가 그를 남북 분단 고착화의 장본인으로 치부하는 좌파세력이 있다. 이것은 옳지 않다.  

◇소련이 먼저 단독정부 수립 

한반도의 분단은 소련의 야욕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의 협조를 기대한 미국의 단견적 정책의 결과이다. 1945년 8월 8일의 대일 선전 포고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미 8월 하순에는 38도선 이북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실질적인 통치에 착수했다. 그것은 9월 8일 미군의 한반도 진주에 훨씬 앞선 것이다. 스탈린은 9월 하순에 북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시했다. 소련군 소령이던 김성주(김일성의 본명)를 앞세워 단독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소련은 1946년 초부터 조만식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의 제거에 착수했다. 

2월에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3월에는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분단 고착화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움직임을 간파한 이승만은 좌우 합작 혹은 통일 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정읍 발언의 배경이다. 여기에는 냉전의 확산이라는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도 뒷받침됐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도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동서문화사·박일영역· 2008)는 책도 있다. 최명 교수는 “나도 이 책과 같이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그는 대한민국을 세웠다”라고 했다.

‘건국전쟁’과 관련한 한 유튜브 방송에 “만약 이승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도 김정은 사진을 방에다 걸어놓고 절을 했을 것”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정상적인 국민이라면 모두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6·25 전쟁 당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으로 진격했다. 이때 이승만은 북진의 정당성을 이렇게 주장했다.“북한의 남침으로 38선이 무너졌다. 이제 38선은 없다.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따라서 북진하는 것만이 민족의 진로이고 통일을 위한 길이다.” 

이런 사람을 두고 남북 분단의 장본인이라고 했으니 그동안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날조되고 조작됐는지 알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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