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2] 분홍신을 신는 방법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12] 분홍신을 신는 방법
  • 한보금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자
  • 승인 2024.03.18 09:54
  • 호수 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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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신을 신는 방법

눈 뜬 소경이 길을 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색상(色相)이 뒤바뀌고 희비(喜悲)의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망상(妄想)이라 하는 거지요.

此無他, 色相顚倒, 悲喜爲用, 是爲妄想.

차무타  색상전도  비희위용  시위망상.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권5 「묵소명(默所銘)」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고 도착한 곳도 올바른지 판단할 수 없을 땐 아이유의 분홍신을 종종 듣곤 했다. 노래 가사 대로 열두 개로 갈린 골목길에서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했고, 좋은 구두를 신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여 신고 있는 신발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감아버릴 용기가 없었고 신발을 아무리 바꾼다고 해도 분홍신이 되진 못했다. 내 눈과 감정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작용하면 그대로 휩쓸려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결국엔 눈을 감고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동화 같은 노래 가사 속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휩쓸리는 나 자신을 방치하게 되었고, 설령 잘못된 종착점일지라도 일단 도착만 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니 나는 여전히 눈 먼 사람이었고 길을 잃어버려 울고 있는 장님이었다.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가던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은 연암이 창애에게 보낸 편지인 「답창애(答蒼厓)」 두 번째 편이다. 연암은 화담이 소경과 대화한 이야기를 통해 본분으로 돌아가 분수를 지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20년 동안 소경으로 살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되었지만, 눈을 가득 채우는 색과 기쁨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 울고 있었다. 그때 화담은 “네 눈을 도로 감아라”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연암은 눈 뜬 소경이 길을 잃은 이유가 망상 때문이라고 하며 눈을 감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분수를 지키는 전체(詮諦)이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증인(證印)임을 밝혔다.

나를 어지럽히는 것의 정체는 모두 망상이었다. 보잘것없는 망령된 생각임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을 무시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며, 내 안의 진실된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혹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해도 자신을 잃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답창애」로 얻은 깨달음은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희비의 감정으로 인해 의미가 변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고민한 끝에 연암의 가르침이 나처럼 길을 잃은 자들에게 길잡이와 등불이 되어 줄 것임을 느꼈다. 지금 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 중 그 누가 자신을 잃지 않은 채 올곧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마모되지 않은 정신으로 항상 정답만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망상에 좌우되지 말고 너의 눈을 감아라”이다. 눈을 가리는 온갖 색과 감정들이 망상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는 순간 길은 나타날 것이다.

한보금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자(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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