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5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5
  • 관리자
  • 승인 2010.01.04 13:02
  • 호수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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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전국노인지도자대회’ 개최
노인지도자 자세 및 역할 성실 이행 다짐
65세 이상 누구나 회장 출마토록 정관개정

안춘생 회장을 영입한 뒤 가장 먼저 행한 사업은 전국노인지도자대회 개최였다. 대한노인회 산하 각급 회장은 해당 지역사회 주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지도자의 자세를 지니는 동시에 그에게 부과된 역할을 수행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과거 이 호 회장 체제 6년, 이병하 회장 체제 6년, 그리고 백창현 회장 체제 6년 등 18년간 대한노인회 회장단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무처가 중심으로 노인회를 이끌어 현상유지 이상의 성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필자는 전국노인지도자대회에 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회장단 회의와 뒤이어 소집한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대회는 2000년 4월 24일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치르기로 결정했다. 행사비용 2500만원은 평소 필자의 일을 재정면에서 뒷받침해주던 숭민산업 이광남 사장의 도움을 받았다.

황인한 사무총장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전국 시군구에서 350여명의 노인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춘생 회장의 개회사 겸 내빈소개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격려사,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축사 순으로 진행됐다. 필자는 이날 ‘노인지도자의 자세와 역할’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펼쳤다.

기조강연이 끝나자 김유길 부회장의 제의로 노인지도자의 자세와 역할의 성실한 이행을 다짐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뒤 오찬회동을 가짐으로서 행사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의 노인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역할과 자세에 대한 다짐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편 안춘생 회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중앙회장은 대한민국 국적의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출마할 수 있고 각 급 회장은 한 차례 중임할 수 있도록 정관 및 회장 선출규정이 개정됐다. 영구집권이 가능하도록 백창현 전임 회장이 정관을 개정해 놓은 것을 원상복구시킨 것이다.

필자는 전국 시군구 지회 단위로 노인자원봉사대 조직, 경로당 회장과 노인대학 운영책임자의 교육프로그램 강화, 시군구 단위로 운영된 노인취업알선센터 활성화와 경로당 노인공동작업반 편성을 적극 권장하는 사업 등을 계획했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야 사업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기에 필자는 ‘대한노인회 활성화를 위한 중장기계획 및 예산서’를 작성해 보건복지부와 기획예산처, 국회 보사위원회 등 관련부처를 대상으로 예산확보를 위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당시 보건복지부 차흥봉 장관은 대한노인회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으나 예산과 관련된 사항은 아무래도 기획예산처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필자는 수차례 기획예산처의 문을 두드렸다. 기획예산처 진 념 장관은 필자의 대학후배이면서 장관이 되기 전에 한동안 필자와 복지정책 연구모임에서 일한 바 있었다.


필자는 진 장관에게 노인의 자원봉사활동 및 취업알선사업을 위해서는 정부예산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진 장관으로부터 추경예산을 편성할 때 검토해보겠다는 긍정적인 답을 얻어냈다. 그러던 중 필자가 상임부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추진해오던 여러 가지 계획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필자는 대한노인회가 명실 공히 전국 400만 노인을 대표하는 단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경로당 이용노인 위주로 돼있는 말단조직체계의 개편작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2000년 12월말 현재 대한노인회 산하조직에 가입돼 있는 경로당수는 약 4200개소, 회원 수는 통계상 198만3000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경로당을 이용하고 있는 노인은 5만3000명 내외였다. 이에 대한노인회는 경로당 이용노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라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필자는 상임부회장으로 있는 동안 대한노인회의 말단조직을 읍면동에 거주하는 노인 전체가 자동적으로 회원이 되는 방향으로 정관을 개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필자가 상임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평소 전국 노인 대상 주간지를 발간하려고 했던 필자는 2000년 2월 하순경 노인문제전문 주간지의 발간계획서를 작성해 숭민산업 이광남 사장에게 건네줬다. 그는 대한노인회가 산하 조직망을 통해 보급을 책임진다면 맡아 보겠다고 했다.

그는 2000년 3월 둘째 주 창간호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매주 꼬박꼬박 6만부씩 발간해 대한노인회가 제시한 배포명단에 따라 우송했다. 신문의 질을 높이기 위해 조선일보 편집부장 출신을 포함한 14명의 상근직원을 고용했다.

신문이 계속 발행되기 위해서는 신문대금을 낼 수 있는 구독자를 많이 확보해야 했다. 필자는 노인들로부터는 구독료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 경로당에 배포하는 신문대금만은 국고 또는 지방비 예산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따라서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과 사돈관계였던 대한노인회 윤경빈 상임고문에게 신문에 대한 국고지원 문제를 상의해 적극 협력하겠다는 답변을 얻어 냈다. 신임 보건복지부 김원길 장관도 노인신문에 대해서 노인복지예산을 지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으니 앞으로 해결책을 강구해 보자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필자가 2000년 8월 대한노인회 상임부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신문에 대한 재정지원계획도 동력을 잃어 결국 그해 10월 셋째 주를 마지막으로 7억원 이상의 적자를 내고 폐간의 운명을 맞이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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