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09] 진포대첩을 아시나요 “조선 수군 전술 모델 된 해전… 이순신도 활용”

1380년 고려 우왕 때 왜선 500척 화포로 격침 시켜

최무선, 화약 대량 생산 개발… 처음 배에 화포 실어

군산시 성산면 금강하구둑 인근의 금강시민공원에 세워진 진포대첩 기념탑.
군산시 성산면 금강하구둑 인근의 금강시민공원에 세워진 진포대첩 기념탑.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세계 해전(海戰) 사상 처음으로 대포를 배에 실어 화포를 발사한 전투이자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해전의 전술을 활용해 왜선 함대를 무찔렀으며,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해전일까. 바로 고려가 금강 하구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진포대첩’(鎭浦大捷)을 말한다. 

진포의 정확한 지점에 대해선 이견이 분분하다. 지금의 금강 하구로 군산과 익산 등 두 도시에서 서로 우리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산시 성산면 금강하구둑 인근의 금강시민공원에 진포대첩 기념탑이 서 있다.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해안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해 고려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위협했다. 

1380년 8월, 왜구는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왔다. 당시 군사 규모가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을 함선에 적재할 때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를 서로 붙잡아 맸다. 그들은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육지를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하고 곡식을 빼앗았다. 

조선 전기 정도전 등이 이성계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에 “왜구들이 정박한 배에다 약탈해온 곡식을 실어 날랐고, 산과 들에 왜구들의 약탈 과정에서 살육된 수많은 백성의 시체가 즐비했고, 곡식을 배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닥에 흘린 쌀이 거의 한 자(약33cm) 높이로 쌓였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조정은 왜구의 침략을 보고 받고 최무선, 심덕부, 나세 등을 지휘부로 임명해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켰다. 고려 함선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 있는 적함을 향해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일제히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적선 500척이 모조리 파괴됐고, 왜적에 붙잡혀 있던 백성 330명을 구출했다. 

◇최무선, 중국 화포 기술서 분석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바로 화포였고, 화포를 처음으로 배에 싣자고 제안한 이가 최무선(1325~1395년)이다. 최무선은 다량의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혼자 힘으로 완성했다. 당시 화약 제조 기술은 중국만 갖고 있었다. 흑색화약의 주요 재료는 염초(질산칼륨), 황, 목탄(숯)인데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염초다. 염초는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할 수 있어 구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질산칼륨으로 정제하는 공정이 필요해 화약 제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어 배에 실을 것을 처음 생각해 냈다.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어 배에 실을 것을 처음 생각해 냈다.

중국은 제조법을 국가 기밀로 숨기고 완성된 화약만을 주변국에 판매했다. 중국의 화약 계통 기술서에는 재료만 소개할 뿐 방법에 대해선 “모든 재료를 적절한 양으로 적절하게 섞는다”라고 대략적으로 서술했다. 최무선이 중국의 화약과 화포 기술서를 모두 분석한 후 직접 만들어 보던 어느 날 친분이 있던 중국 상인(원나라 사람)으로부터 제조 기술의 힌트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화약 양산에 성공한 최무선은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고, 이를 조정에서 시험해 확인하고는 화약국(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 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문신인 권근(權近·1352~1409년)은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이란 시를 지어 최무선의 업적을 찬양했다.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네(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水艦信風過鳥翼)/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가 갈대에 불지른 게 가소롭고(周郞可笑徒焚葦)/ 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넌 것은 자랑도 못 된다네(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 중 으뜸이리(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 주어(天誘公衷作火砲)/ 한번 뱃싸움에 흉한 무리 쓸어냈네(樓船一戰掃兇徒)”

◇이성계의 ‘황산대첩’에 영향 끼쳐 

진포대첩은 왜구가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고려가 왜구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뜻깊은 전투였다. 이 해전으로 인해 해안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방향으로 달아났고,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숨어들었다. 특히 왜군의 주력부대는 상주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 내역에 진을 쳤다. 

고려 조정은 원수 박수경과 배언 등을 적진에 보냈지만 패해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한 500여명이 전사했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는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 주둔하며 “장차 말을 금성에서 먹여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1335~1398년)를 양광·전라·경상삼도순찰사로 임명해 왜구 토벌을 명령했다. 이성계는 남원 운봉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활로 쏘아 죽이고, 대대적으로 왜적을 소탕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왜적은 단지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주했으나 곧 이성계에 의해 토벌됐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의 승리로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이 기세를 몰아 조선을 개국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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