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이 정몽주 살해한 것에 격분한 이성계, 아들에 칼 뽑아
이성계 두 번째 부인 강씨가 몸으로 막아줘 간신히 목숨 구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이성계와 정몽주는 처음에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1392년 조선 개국 직전 고려는 두 세력의 싸움이 극에 달했다. 하나가 권문세족, 또 다른 하나가 신진사대부이다. 왕은 무기력했다. 권문세족은 기득권층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를 유지하려 했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힘을 키워 나가는 신흥 세력으로 권문세족의 반대편에 섰다.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들이며, 그 중심에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가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李成桂·1335 ~1408년)를 본 순간 그에게 매료된다. 정몽주가 참모로 있던 고려군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있을 때 이성계가 1000여명의 가별초를 이끌고 나타나 여진족을 무찔렀다.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해 “풍모가 호걸 같으니 꽃동산의 송골매로구나. 지략이 깊고 웅대하니 남양의 용이로다. 서책에서 옛사람의 행적을 찾아봐도 그대와 같은 이는 드물구나”라고 극찬했다.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의 전투에 참모로 종군했고, 이성계에게 학자들을 소개하는 등 변방(동북면)의 무사인 이성계가 살벌한 정치판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랬던 둘 사이가 갈라지게 된 건 고려의 앞날을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면서다. 이성계는 고려를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쪽이고,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개혁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새로운 국가의 출범에 정몽주 같은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를 곁에 두고자 했다. 반면에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정몽주, 이성계 살해 자객 보내
어느 날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눕는 일이 생겼다. 이 틈을 타 정몽주는 이성계와 그 가족을 살해하고자 자객을 보냈다. 자객은 아픈 기색은커녕 멀쩡한 모습의 이성계를 보는 순간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판단해 그대로 되돌아갔다. 이성계의 가족들도 아들 이방원(李芳遠·1367~1422년)이 미리 대피시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평소 정몽주를 아버지의 대업에 걸림돌로 여기던 이방원은 이 사건을 고비로 정몽주를 없애기로 작정했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사람을 보내 집으로 초대했다. 정몽주 측근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정몽주는 이성계 병문안 겸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이방원은 지필묵을 가지고 정몽주를 방으로 안내하며 “숙부께서 자객을 보낸 걸 알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정몽주가 “나를 죽이겠는가”고 묻자, 이방원은 “그럴 거라면 칼을 가지고 오지 지필묵을 가져오겠나요. 아버님은 숙부님을 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생은 마음이 복잡합니다. 숙부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제 뜻을 밝히는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고 말했다.
이때 이방원이 지은 시가 “이런들 또 어떠하리, 저런들 또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이다.
정몽주가 웃으며 그 자리에서 화답의 시를 지었다. 역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하는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정몽주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힌 뒤 이성계의 집을 나와 말을 탔다. 이때 정면을 향하지 않고 뒤를 보고 탔다. 마부가 “왜 거꾸로 타느냐”고 묻자 “흉한(兇漢)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낫다”고 답했다.
정몽주는 선죽교 부근에 이르자 말에서 내리며 마부에게 “우리 아들 종성이에게 우리 집안은 충효를 숭상하는 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말한 후 마부와 말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았다.
정몽주는 개천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 이씨는 대문을 나서는 정몽주에게 “(이방원의) 초대에 응하지 말라”며 시 한 편을 보여주었다. 그 시가 바로 “까마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시작하는 ‘백로가’(白鷺歌)이다.
정몽주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서너 명의 자객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정몽주의 머리를 향해 철퇴를 내리쳤다.
◇청계천 광통교에 강씨 묘 병풍석 쓰여
이성계는 아들이 정몽주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격분했다. 이성계는 “끝내 이놈이 일을 저질렀구나”라면서 이방원을 불러오라고 했다. 이성계 앞에 무릎을 꿇은 이방원은 “아버님의 대업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정몽주를 살려두면)우리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이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을 빼 이방원의 목을 향해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두 번째 부인 강씨(~1396년·신덕왕후)가 나타났다. 강씨는 몸으로 이방원 앞을 막으며 “방원이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다 몰살당할 뻔했습니다. 방원아, 어서 달아나거라”라고 외쳤다.
이방원은 어릴 적부터 친모보다 강씨의 보살핌을 더 많이 받고 컸다. 이방원도 늘 그런 강씨를 고맙게 생각하고 후에 왕이 되면 잘 모시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둘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세자 책봉 문제였다.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한씨와 사이에 6명의 아들과 강씨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온 자신을 세자로 지명할 것이라고 당연히 여겼다. 그런데 이성계가 당시 10세 불과했던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분노했다. 강씨의 꼬드김 때문이라고 여긴 이방원은 강씨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었다.
강씨가 갑자기 질환으로 사망하자 이성계는 자기 눈에 보이게끔 덕수궁 근처에 강씨를 묻고 봉분을 높이 쌓았다. 1·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 제3대 국왕(태종)이 된 이방원은 먼저 강씨의 봉분을 갈아 없애고, 능을 정릉으로 옮기고 묘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은 청계천 범람으로 휩쓸려간 나무다리 대신 석교(광통교)를 놓을 때 강씨의 묘를 지키던 병풍석 등을 가져다 쓰도록 명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