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15] 왕들의 유배지 ‘교동도’ “고려왕‧조선 왕족의 ‘지옥 감옥’…한양과 가까워 감시 쉬운 탓”

연산군은 집 밖에 못 나오게 가시울타리 쳐… 가장 가혹한 형벌  

영창대군, 8세 때 유배 중 사망·안평대군도 가시울타리에 갇혀 

연산군의 교동도 유배지. 사진=연합뉴스
연산군의 교동도 유배지. 사진=연합뉴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강화도 바로 옆에 교동도(喬桐島)란 섬이 있다. 큰 오동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구 약 3000명, 면적 47㎢로 예성강·임진강·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교동현으로 불렸다가 조선 인조 때 교통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경기·황해·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1896년 교동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강화군에 편입돼 교동면으로 불리게 됐다.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유배형은 차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교동도에 유배 된 고려왕들은 21대 희종, 22대 강종, 30대 충정왕, 32대 우왕, 33대 창왕 등 무려 5명이나 된다. 조선시대는 연산군, 광해군, 안평대군, 영창대군,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 부지기수이다.

이 섬이 지옥 같은 감옥이 된 이유는 한양과 가까워 죄인을 감시하기 용이했고, 물살이 급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점 때문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로 왕래가 가능하나 그 옛날에는 배가 없으면 다닐 수 없었다. 북한과 가까워 출입 시 신분증을 보여야 한다.

◇연산군, 한양에서 교동도 6일 결려

교동도에 유배된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이다.  연산군은 사화를 일으켜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며 폭정을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이곳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신하들이 주도해 그를 폐위하고, 이복동생 중종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다. 유배형 중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 중 하나이다.

연산군이 유배당하던 당시 모습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잘 묘사돼 있다. 연려실기술은 단순한 야사가 아니라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를 객관·체계적으로 정리한 실증적 역사서이다. 

연산군이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지에 도착한 모습의 조형물. 사진=연합뉴스
연산군이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지에 도착한 모습의 조형물. 사진=연합뉴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내전문을 나와 땅에 엎드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 특별히 왕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됐습니다’라고 고한 후 4명이 메는 평교자(종1품이 타는 가마)에 올랐다.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 1명이 따라갔고,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 심순경 등이 동행하고, 정3품 당상관이 군사들과 호위했다. 

9월 2일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있는 선인문을 빠져나와 돈의문·서대문으로 한양도성을 벗어나 연희궁(지금의 연세대 정문) 근처에서 유숙한 뒤 둘째 날 김포, 셋째 날 통진에서 유숙하고, 넷째 날 강화로 들어와 유숙하고, 다섯째 날인 9월 6일 유배지인 교동에 도착했다. 

안치되는 곳의 울타리는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 없으며,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간신히 넣을 수 있고, 연산군이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목놓아 울었다.”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방탕과 사치를 일삼았다. 각지에서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했고,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원각사를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이때 선발해 들인 흥청(興淸)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 등으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진다고 해서 ‘흥청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이 나중에 ‘흥청망청’으로 변했다.  

연산군은 유배된 지 두 달 만인 11월 8일 역질에 걸려 사망한다.

◇광해군도 교동도 거쳐 제주서 사망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년)도 교동도에 위리안치됐다.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혼인했다. 1438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을 토벌하고,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 행정기관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해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정치적인 대립 관계에 놓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안평대군도 지지기반을 잃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받아 강화도로 귀양 갔다. 그 뒤 교동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5세를 일기로 사사(賜死·임금이 죄인에게 독약을 먹여 죽게 하는 것)되고 말았다.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 왕족이 교동도에서 유배 중 사망했다.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년)이다. 그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1552~1608년)가 늘그막에 왕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유일한 적자였다. 광해군 등은 모두 후궁 소생이다. 어린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는 세력과 장성한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 간 팽팽한 긴장이 이어지다가 선조의 사망과 함께 광해군이 보위를 이어받았다. 

5년 후 역도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영창대군은 교동도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숨졌다. 당시 나이 8세였다. 

후에 광해군도 즉위 15년 만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돼 강화도·교동도로 옮겨 다니다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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