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16] 얼자 출신으로 정승 반열에 오른 유자광 “모함과 술수로 정적 제거하고 권력 차지… 모친에겐 효자(?)”

양반과 천민 사이에 태어나 과거 볼 자격도 없어…임금 총애로 출세

무오사화 일으켜 김종직 부관참시 당하게 하고 연산군의 지지 얻기도 

드라마 속의 유자광. 그의 남다른 생애를 다룬 책‧영화‧드라마가 많다.
드라마 속의 유자광. 그의 남다른 생애를 다룬 책‧영화‧드라마가 많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시대 얼자(孼子)는 과거를 볼 자격조차 없었다. 얼자는 양반과 천민 사이에 태어난 자식을 말한다. 서자(庶子)는 양반과 양인 첩 사이에 낳은 자식이며, 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길동이 얼자이다. 홍길동에 버금가는 얼자 출신이 또 있다.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오르고, 군(君) 호칭을 받은 유자광(柳子光·1439~1512년)이다. 

유자광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다섯 임금에 잘 보여 높은 자리를 꿰찼으나 그 여파로 인해 귀양까지 가는 등 곡예의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규는 종2품인 경주부윤(府尹·속칭 수령)을 지냈다. 

첫 직업은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사관 정도 된다. 알량한 집안 덕에 그나마 그 자리라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세조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이시애(李施愛)가 일으킨 난을 출세의 기회로 삼았다. 

세조는 군사 3만 명을 동원해 난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진척이 없었다. 그걸 본 유자광이 “저는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합니다. 비록 미천하지만 전장의 한 모퉁이에서 싸워 이시애의 머리를 바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일개 갑사의 기개에 찬 글을 보고 감동 받은 세조는 유자광을 겸사복(왕의 신변 보호를 맡은 친위군)에 임명했다. 유자광의 몇 가지 제안으로 난이 진압되자 세조는 다시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했다. 

◇모함받은 관리의 처‧딸 노비로 얻어 

잘 나가던 유자광이 세조의 사망으로 외톨이가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에서 공적을 세운 남이(南怡·1443~1468년)를 희생양으로 삼아 반전을 꾀했다. 남이가 평소 한명회나 신숙주 등 세조 때 훈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며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자기에게 말해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남이의 옥(獄)’이다. 국문을 배겨내지 못한 남이는 역모를 인정해 불과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유자광은 이 일로 포상받았다. 무령군으로 봉해졌고, 남이의 집을 비롯 공범으로 처형된 관리들의 처와 딸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유자광이 권력의 중심에 선 계기는 연산군 때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史禍)였다. 1498년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의 흠이 될 만한 행적을 여러 가지 적어놓았다며 문제 삼았다. 

사초에는 “사육신이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세조가 큰아들인 덕종의 후궁을 취하려 했다”는 등 세조의 도덕성과 왕위 계승의 명분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다. 연산군은 세조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보고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고 유자광은 연산군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됐다. 

정국이 안정되자 유자광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무오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유자광은 이를 의식해 자기가 먼저 시골에 물러나겠다고 정치적인 제스처를 썼지만 대간의 지속적인 상소로 파직에 이르렀다. 거기에 갑자사화(甲子士禍)까지 주도했다는 혐의가 붙었다. 

◇모친 초상 치를 때도 물의 일으켜

유자광은 결국 1507년(중종 2) 4월 광양을 거쳐 평해(울진)로 유배 갔다. 그의 아들과 손자도 귀양지로 보내졌으며, 공신에서 삭제됐다. 그 후에도 그를 천민으로 돌려버려야 한다는 상소가 잇따랐다. 

유자광은 73세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얼자 출신으로 임금의 신임을 얻어 병조판서, 한성판윤, 의정부 좌찬성, 대광보국승록대부(삼정승과 같은 급)까지 오른 그로선 비참한 말로였다. 

한편 유자광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물의를 일으켜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에 대한 유자광의 장황한 변명을 담은 상소를 음미해볼 만하다.

“그러나 의례를 뛰어넘어 상여(喪轝)를 만들었다고 탄핵한 것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무명과 보통 명주로 꾸미고 먼 길에 부러지고 상하기 쉬워 틀나무(機木)를 튼튼하게 만들어 조금 무거웠을 뿐인데, 어째서 의례를 뛰어넘었다고 하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66명이 상여를 메고 갔는데 어째서 100여 명이라고 했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방상씨(方相氏·악귀를 막는 목적으로 탈을 쓰고 상여를 이끄는 사람)는 상례에서 으레 사용하는 것인데, 어째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신은 경기에서 남원에 이르는 길의 역참마다 미리 양곡을 모아놓았으며, 양성‧공주‧연산‧은진‧여산‧임실에는 신의 전장(田莊)이 있어서 유숙하는 곳에서는 노복들이 필요한 물품을 각자 마련하되, 그래도 중도에 비용이 넉넉지 못할까 해서 두 수레로 잡물과 쌀‧콩‧소금‧장을 싣고 갔습니다. 추종(騶從)은 상여를 호행(護行)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일가권속이 모두 갔으니 그 수효가 많기는 했지만, 거리가 먼데 가난한 고을에서 어찌 다 접대했겠습니까? 약간의 곡물과 마초(馬草)를 주거나 일부 인원에게 접대했으며, 길가에 제물을 배설하고 애도한 자까지 있었는데 그것을 물리치지 않은 것은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대부가 어버이의 영구를 모시고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이것은 모두 아들로서의 정리와 다른 사람의 상사를 애도하는 뜻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실정이 이런데, 신이 추종을 많이 데리고 가서 각 고을에 식사를 대게 한 듯이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신은 원통하게 생각합니다.”(연산군 1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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