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때 한국전쟁 참전 박경석씨
17세 때 한국전쟁 참전 박경석씨
  • 연합
  • 승인 2010.06.1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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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입교 25일만…여러 전투 참가해 인민군에 포로까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25일 만에 6·25가 터졌어. 전쟁이 났다고 했을 때 무서운 줄 몰랐지. 다음날 동기생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비로소 실감이 났어.”

1950년 6월 1일 당시 17세였던 박경석(76·사진)씨는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2기로 입학했다. 스무닷새 동안 겨우 군 기본자세와 예절, 영점조준 사격을 배웠을 뿐인데 전쟁이 났다.

박씨를 포함해 아직 군 생활에 적응도 못한 육사생도 330명은 그날 곧바로 포천전투에 투입됐다.

그는 “공산당은 쳐부숴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서운 줄도 몰랐다”며 “우리가 소총 몇 번 날리면 다 도망갈 줄 알고 겁도 없이 군가를 신나게 부르면서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사정이 달라졌다.

이튿날 동이 트자 ‘쾅쾅’하는 포탄 소리가 천지개벽 하듯 들렸다. 인민군이 다가와 교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돼 순식간에 86명이 죽었다. 피투성이로 한참 싸우다 후퇴명령이 떨어져 태릉 화랑대로 물러섰다.

“사람 죽는 걸 보고 육사 지원을 후회하기도 했다. 25일 만에 이런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집어넣는 나라가 어딨나 싶었다.”

전쟁은 현실이었다. 이후 불암산 전투, 한강 전투, 수원 전투를 겪으면서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부산 동래고에 집결했다가 3개월 단기교육을 받고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1950년 10월23일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
그가 경험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북방 1077고지 전투’에서 인민군 포로가 됐을 때.

12월 엄동설한에 소대장으로 부하 40여명을 데리고 평창의 산꼭대기 작전지역으로 올라가 공격 준비를 하다 인민군에게 노출돼 총 한번 못 쏴보고 빗발치는 수류탄 파편에 맞았다.

“허벅지에 피가 나고 고막이 터져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인민군 야전 병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인민군이 국군 부상병을 죽이는데 나는 너무 어려서 살았다. 어린 애가 소위 계급을 달고 있었으니….”

다행히 박씨와 대화 몇 마디 나눠본 인민군 사단장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인민군에 현지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던 중 1951년 4월 어느날 밤 모두 잠든 틈을 타 남쪽으로 도망쳤다.

박씨는 “길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더라도 남쪽에서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31년간 군 생활을 하다 12·12 쿠데타 때 “정치군인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군복을 벗었다. 이후 작가로 활동하면서 전장 경험을 담은 대하소설, 장편소설, 시집 등 73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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