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 70대 노형제, 43년 만에 극적 상봉
월남전 참전 70대 노형제, 43년 만에 극적 상봉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1.04.18 16:53
  • 호수 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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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미국으로 떠났던 청년이 70대 노인이 돼서야 고국을 찾아 43년만에 꿈에 그리던 형을 만났다.

지난 4월 10일 오전, 서울 구로경찰서 개봉지구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쟁 때 잃어버린 형을 찾는다며 수소문하고 다니는 할아버지를 봤는데 경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백발의 차덕현(70) 어르신을 만났다. 차 어르신은 “월남전 때 베트남에서 노무자로 파월됐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43년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며 “유일한 혈육인 형의 생사라도 좀 확인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털어놨다.

그는 고국을 떠나기 전 살았던 구로구 개봉동 일대 동사무소와 공인중개소 등을 돌아다니며 형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너무나 달라진 건물들 탓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옛 집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담당 경찰관이었던 김 모(52) 경위는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지만 어르신의 표정이 너무 간절했고, 동네를 헤매고 다닌 듯 지친 기색도 역력했다”며 “경찰서로 자리를 옮겨 자초지종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차 어르신에 따르면 1941년생인 그는 27~28세 청년이었던 1968~1969년, 참전을 위해 베트남 땅을 밟았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던 1973년 개인 사정에 의해 조국 대신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행선지로 택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택시기사, 세탁소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바쁘게 살았다. 기반을 만들어 고향을 찾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형(차덕선·1939년생)을 급히 찾지도 않았다. 그러나 54세에 이혼의 아픔을 겪고 생활에 지치면서 고향으로 향한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미국 알래스카로 이주했고, 지금은 주정부가 제공하는 임대아파트에서 월 2000달러가 조금 넘는 연금을 받고 지내고 있었다.

“타국 땅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게 살다보니 어느새 나도 70대 노인이 돼 버렸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면서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해졌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간 연금을 아끼고 아껴 비행기 삯을 만들어 이제야 오게 됐다.”

차 어르신의 딱한 사연을 들은 개봉지구대 경찰관들은 형의 이름과 생년월일로 신원을 조회해 주소지가 양천구 신정동 모 아파트란 사실을 알아냈다. 마침 이 곳에는 형 차덕선 어르신의 딸 부부가 살고 있었고, 딸은 전남 목포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형은 개봉지구대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두 형제는 43년 만에 서로의 음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 어르신은 40년이 지났지만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형임을 알아채고 눈시울을 붉혔다.

다음날 두 사람은 목포에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두 사람은 부모님 묘소가 있는 경기 파주에 들러 43년 만에 함께 큰절을 올렸다.

차 어르신은 “40년 동안 얼굴에 주름이 조금 생긴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긴 이별 후 짧은 시간동안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못 다한 가슴 속 이야기들도 밤새 나누고, 목포 유람도 즐겼다”며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부모님 묘소에 꼭 같이 찾아뵙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말했다.

차 어르신은 내년을 기약하며 지난 4월 16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종호 기자 joy@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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