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25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기고] 6·25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 관리자
  • 승인 2011.07.01 16:29
  • 호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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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익 한국문인협회 홍천지부장

6·25전쟁이 일어 난지 61년이 됐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온 강산에 흩뿌려지고, 국토가 폐허가 됐던 끔직한 전쟁의 기억은 휴전이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전쟁의 무서움과 북한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고 편리하고 좋은 것들만 누리려고 하는 것 같아 염려스러운 마음이 크다.

61년 전 필자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네살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끔찍한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필자의 고향은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가는 44번 국도 말고개 밑에 위치한 화촌면 원평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태백준령을 잇는 가리산 줄기라 남침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군이 제일 먼저 전투력을 탐색하기 위해 자주 출몰했던 곳이었다.

격전지였던 이곳은 전쟁 당시 사상자 유골이 산적해 있었으며, 적의 탱크를 몸으로 막아낸 육탄용사 위령비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50년, 초여름. 평화롭던 마을은 소규모 도발을 일삼는 북한군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마을 청년들은 순번을 정해 밤마다 무기를 들고 보초를 서야만 했다. 한번은 아홉 명의 마을청년들이 이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참극도 벌어졌다. 마을에는 전쟁이 곧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하지만 며칠 뒤 소문은 현실이 됐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보국대로 전선에 투입됐고, 어머니는 남겨진 네 자녀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형은 맏아들답게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피난민 대열에 합류해서도 무섭다고 엉엉 울던 누나들의 모습도 기억난다.

하지만 피난민 대열에 민간 복장을 한 적군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피난구역도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다. 유엔군 폭격기가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때의 폭격으로 지금의 인도교, 당시 홍천읍의 화양교가 끊어졌다. 막힌 도로 위에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자 우리 가족은 전쟁이 한창인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올망졸망한 네 자녀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비장한 각오 때문이었다.

당시 마을에는 중공군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민가에 감춰둔 곡식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준비를 하며 우리 집을 취사장으로 이용했고, 어머니는 그들의 식사를 도우며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만들었던 음식은 김치 주먹밥이다. 달군 가마솥에 살짝 구워서 자루에 담아가면 전투식량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각별하게 보호했다. 전투가 있기 전에는 먼저 피하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군율 중에는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가족은 논두렁에 만든 움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투기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다. 전투기 소리가 나면 움막에서 나와 높은 논두렁 밑에 납작 엎드렸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불덩어리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여러 번. 마을이 폭격에 맞아 불에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엉엉 울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날 비행기 공격이 이어졌다. 유엔 지상군이 전세를 역전시켜 마을 뒷산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전세에 밀린 중공군은 앞산 말고개를 진지 삼아 마지막 백병전을 벌였다.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는 숨죽여 움막에 몸을 숨긴 채 며칠을 보냈다. 밤새도록 총소리가 오가고 다음 날 아침 움막에서 나와 보면 쌍방의 시체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무서워서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내게 전쟁은 이유 없는 다툼과 죽음의 기억들뿐이다. 이처럼 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사연을 남겼다.

하지만 전쟁의 아픔과 그 흔적을 담은 채 살아가는 많은 노인들도 땅에 묻혀 가고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전쟁문학이나 영화가 넘쳐나던 한때도 이제 지나갔다.

전쟁을 겪었던 노인세대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잊혀지고 있다. 상처의 아픔이 없어져 좋을지는 모르나 아주 없었던 것으로 잊혀지면 안 되는 이 땅에 평화를 위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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