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3·1절… 특별인터뷰
“통한의 세월… 관심 갖는 분들께 감사할 뿐”
다시 돌아온 3·1절… 특별인터뷰
“통한의 세월… 관심 갖는 분들께 감사할 뿐”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2.03.02 14:08
  • 호수 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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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앳된 나이에 日위안부 끌려갔던 이옥선(86) 어르신

“(위안부로) 끌려갈 때 부모도 말 못했는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지금은 그래도 우리들을 잊지 않고 ‘나눔의 집’을 찾아주고 돌봐주는 사람들을 보면 고맙기만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이옥선(86) 어르신은 “못 배워 언변이 좋지 못한데 중국 연변에서 생활한 탓인지 아직 한국말은 잊지 않았다”며 “어눌해도 이해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어르신의 말투는 또렷하고 분명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단아한 이 어르신이 손으로 가리킨 사진에는 짧은 단발머리, 동그란 얼굴의 앳된 소녀가 있었다. 해방 후 중국에서 찍은 사진이다. 젊은 시절에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다가 지난 2000년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한 ‘나눔의 집’의 손길로 귀국할 수 있었다. 60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이었지만 이 어르신은 당시 사망신고가 돼 국적이 말소된 상태였다.

이 어르신은 “어르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국, 그리고 당시 아버지와 오빠 연배의 어르신들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일본군에게 매일같이 매 맞고 칼로 난도질당하고 산 것이나 중국에서의 고된 생활에 비하면 ‘나눔의 집’에 있는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할 뿐”이라고 답했다. 잠시 눈시울을 붉힌 이 어르신은 “화가 난다, 어떻다 말할 수 없다. 그때는 부모라고 해도 다들 별 도리가 없었던 때 아니냐”며 “이해한다”고 했다.

“제 삶은 얘기하자면 아주 길어요. 학교에 가고 싶어 일곱 살 때부터 엄마한테 떼를 썼고, 위안부로 끌려가던 해까지 매일 같이 조르다 울산 한 가정의 수양딸로 가게 됐습니다.”

이 어르신은 이게 화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부산 보수동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팍팍한 살림의 부모님께 학교에 가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수양딸로 들여서라도 가르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이 어르신은 울산의 한 가정으로 보내졌다.

되돌아보면 서럽고 또 서러운 삶이었다. 수양딸로서의 삶도 꼬이기만 했다. 공부는커녕 도착한 날부터 식모살이를 시작해 나중에는 선술집에 팔아넘겨졌다.

술집에서도 식모살이를 하던 어르신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42년 7월 28일 오후 5시쯤이었다. 어르신은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낯선 두 명의 남자들에게 양팔을 낚여 납치됐고, 그 날 여섯 명의 소녀와 함께 공포 속에 중국 국경을 넘었다.

▲“일본군 만행 견뎌 살아남으니 위안부라는 꼬리표만…”
“열다섯 살에 위안부로 끌려가 이제 여든 여섯이 됐습니다. 모진 게 사람 목숨 같습니다. 일본군한테 칼부림 당하고 따귀를 하도 맞아 거의 눈도 멀고 귀도 먼 것이나 다름없게 됐지만 여든, 아니 아흔 가까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니까요.”

일본군은 손이나 말 대신 칼로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기 일쑤였고, 그래서 어르신의 손목과 발목에는 깊게 베인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어르신은 “일본군은 12살 혹은 13살을 갓 넘긴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듣는다며 한번 때리면 경고가 아니라 진짜 죽이려고 때렸다”고 했다.

어르신은 “지금 살아있는 할머니들 몸을 들여다봐라”며 “칼자국 하나 없거나 뼈 안 부러진 할머니가 없다”고 전했다.

이 어르신은 “한번은 도망치려고 했다가 잡혀 일본군이 칼로 발목을 내리찍었는데 안 잘리고 상처만 깊게 패였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연신 발목 주위를 주물렀다. 먼 곳에서 봐도 흉터가 깊었다. 어르신은 “자궁을 들어내버리고 없다”며 “위안부라는 꼬리표만 얻었다”고 했다.

또, “위안부들이 모두 다 심한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다”며 자신은 유달리 학대와 고생이 심한 경우였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일본군은 말 한마디 없이 몇 천 명이나 되는 위안부들을 전장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당시 글도 모르고 돈도 없던 이 어르신은 중국에 남아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日, 돈 벌러 간 것이라 매도… 일본정부의 사죄만 바랄 뿐”
“(한국에) 올 수 있다고 해도 못 돌아왔을 겁니다. 몸이 그렇게 망가지고 버려졌는데 어떻게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겠어요. 저만 아니라 중국 땅에 버려진 위안부 모두 그랬지요.”

이 어르신은 “부모님을 어떻게 뵙겠느냐”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중국인에게 괄시를 받으며 빌어먹고 사는 삶, 그리고 지쳐 쓰러져 잠든 그 곳이 집인 삶이 지속됐다.

어린 나이에 중국 연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 어르신은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남자를 만나 아들도 입양해 키웠다. 하지만 아들은 장애아로 자랐다. 현재 아들은 중국에, 딸은 북한에 있다. 두 명의 손자가 이제는 이 어르신의 낙이다. 손자 한 명은 10년 전 어르신과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중국의 아들이나 손자도 3~4년에 한번 꼴로 본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돈 벌러 간 거지 ‘위안부’라는 것은 실제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못 배운 열다섯 살의 이옥선이 중국으로 가고 싶어 그 모든 것을 계획했겠는가?’”

이 어르신은 “여기 계신 할머니들도 9명에서 지금은 7명만 남았는데 하나 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며 “일본 천황은 죽고 없으니 내가 죽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를 받고 싶다”고 했다. 이 어르신도 얼마 전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는 “당연히 나서줘야 할 한국 정부가 뒷짐만 지고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화가 난다”며 “다른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도 고마울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르신이 ‘나눔의 집’에 있었던 10년 동안 양아들이 되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과 일본, 독일에서 와 안부를 묻고 간 사람들도 있다. 지난해 미국의 한 언론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르신의 모습과 함께 위안부 얘기를 싣기도 했다. 일본 등 각지에서 이 어르신을 돕는 손길이 많다.

“제가 여기서 더 잘 입기를 바라겠습니까. 더 잘 먹기를 바라겠습니까. 일본이 돈 벌러 갔던 것이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위안부에게 행했던 모든 잔혹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사죄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눈 감고 죽을 수 있어요.”
이호영 기자 eesoar@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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