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렵게 살았지만, 아이들은 리더의 삶 살길 바래”
“우린 어렵게 살았지만, 아이들은 리더의 삶 살길 바래”
  • 연합
  • 승인 2012.05.11 14:13
  • 호수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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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세번째 ‘한인 美연방 판사’ 아들 키워낸 파독광부·간호사 부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떠난 한국이지만 한 순간도 그 배경에서 벗어나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식 키우느라 앞만 보고 달려왔으나 앞으로는 한국의 그늘진 곳을 위해 시간과 건강을 바치며 살고 싶습니다.”

미주 한인 역사상 세번째로 종신직 연방판사에 오른 시카고 변호사 출신 존 Z.리(44·한국명 이지훈)의 아버지 이선구(72) 씨와 어머니 이화자(68) 씨의 바람이다.

이들 부부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충남 연산 출신의 이선구 씨는 1965년 독일로 향했다. 고시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고민하던 중이었다.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면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공부할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대전 출신의 이화자 씨는 1966년 파독 간호사 1기로 한국을 떠났다.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자랑스럽게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켄 광산에서 일하던 이선구 씨는 프랑크푸르트의 병원에 배정된 이화자 씨와 고춧가루를 매개로 만났다. 한국에서 오는 간호사들 편에 배달된 고춧가루를 찾으러 프랑크푸르트에 갔다가 신붓감을 만난 것이다.

둘은 라인강변을 따라 운행되는 기차를 타고 3~4시간 거리에 있는 아켄과 프랑크푸르트를 오가며 만남을 가졌고 결혼했다.

첫 아기(존)가 태어났지만 일하며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이화자 씨의 친정어머니에게 보내기로 했다. 리 판사가 생후 3개월부터 만 5세 때까지 대전의 외할머니 손에 자라게 된 배경이다.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독일 정착은 어려웠다. 영주권을 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이 씨 부부는 1970년 삶의 터전을 시카고로 옮겼다. 이화자 씨는 병원에서, 이선구 씨는 공장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았고 1972년 아들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초기 이민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남편은 새벽에 나가 오후 5시쯤 퇴근했고 아내는 오후 3시면 병원으로 출근했다. 낮 시간 동안 어린 아들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그렇지만 아들 존은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이 씨 부부는 “아이들에게 ‘미국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히 있다. 같은 조건이라면 백인을 선택한다. 남들 두 배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쳤다”며 “우리는 어렵게 살았지만 아이들만은 리더의 삶을 살기 바랐다”고 강조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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