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여긴 영조, 회갑연도 못 치르게 해
한중록 “죽기 직전 검은 피 한 가득 쏟아…가슴 속 울분 쏟아낸 듯”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왕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 왕비. 53년간 부부였지만 단 한 번도 남편이 찾지않아 빈방을 지켜야 했던 여인. 자식도 없고, 회갑연도 못 치르게 하는 등 죽는 순간까지 남편에게 무시당한 비운의 왕비가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1693~1757년)이다.
정성왕후의 삶을 이처럼 초라하고 불행하게 만든 왕은 영조(英祖·조선 제21대 국왕·1694~1776년)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숙종 30년), 11살 때 10살 연잉군(延仍君·영조)과 혼인했다. 1721년, 경종(景宗·조선 제20대 국왕·1688~1724년)이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됐다. 3년 후인 172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정식 왕비가 됐다.
영조와 정성왕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궁궐 안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한 번은 정성왕후가 복통으로 며칠 동안 고생했다. 그러자 영조는 “담증 가지고 엄살 부린다”며 핀잔을 줬다. 의관들도 더 이상 영조에게 경과를 보고하지 않았다. 의관은 “전하께서 중전마마에 관한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 할 것”이라며 내관을 찾곤 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생일도 묵살했다. 조선에선 왕비의 생일에 신하들이 하례를 했다. 정성왕후 55번째 생일에 이를 행하려고 하자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탄신 하례를 못하게 했다.
더 나아가 회갑연조차 건너뛰었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라고 말하자 영조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곤 영빈 이씨에게서 얻은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년)에게 “네 엄마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크게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냈다.
하교를 받은 사도세자는 매우 실망하며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면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영조는 “말이 지나치구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완충 역할
영조는 왜 이렇게 정성왕후를 무시했을까. 야사에 몇 가지 설이 있다.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더니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다. 정성왕후가 무심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영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영조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출신의 무수리 숙빈 최씨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의 손은 뼈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그런 이유에서 정성왕후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로 인해 영조가 곤경에 처했던 일이다. 서덕수는 경종을 죽이고 연잉군을 옹립하려는 ‘삼수(三守)의 옥(獄)’ 주모자 중 한 명이다. 서덕수가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 두시라”고 발언해 영조는 이복형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삼수의 옥은 1721~1722년 두 해에 걸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의 정치 싸움이 경종의 화를 불러 노론이 대거 숙청된 사건이다.
영조가 정성왕후를 멀리한 또 다른 이유는 사도세자를 감싸고 도는 정성왕후의 태도 때문이다. 아이가 없는 정성왕후는 영조가 후궁들 사이에 낳은 왕자와 공주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영조의 미움을 받는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에 완충 역할을 했다. 사도세자도 정성왕후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따르며 극진히 모셨다. 정성왕후가 병석에 누웠을 때 사도세자가 찾아와 “소자가 왔사옵니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울먹이자 영조가 “네 옷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고 꾸중하기도 했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창덕궁 외진 곳에 두고 자신은 경희궁에 있으면서 문안이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무덤도 혼자…영조는 두 번째 계비와
정성왕후는 64세 되던 해 창덕궁 대조전 관리합에서 눈을 감았다. 영조는 이때 인륜을 거스르는 행동을 해 대신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정성왕후가 숨을 거둔 직후 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의 부음이 전해졌다. 그러자 영조가 사위의 빈소로 떠나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승지 이채준이 ‘이렇게 망극한 시기를 당해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라고 하자 영조는 진노해 이채준의 직을 박탈했다. 이어 대사간 이득종이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그의 직을 박탈하였다.”
영조는 66세에 51년 차이가 나는 15세의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년)를 계비로 맞았다. 혼담 얘기가 나오자 영조는 짐짓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냐”고 하면서도 신하들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혼인을 수락했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성왕후의 며느리가 되는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정성왕후가 죽기 전에 요강에 검은 피를 한가득 토했다. 시어머니가 가슴 속 울분을 다 쏟아내고 돌아가셨다”고 적었다.
이랬던 영조가 사후에는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자 했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 홍릉(弘陵)에 정성왕후의 무덤을 조성하며 그 옆에 땅을 비워두었다. 그러나 영조의 손자 정조(조선 제22대 국왕·1752~1800년)가 서오릉의 정 반대편 동구릉에다 정순왕후와 같이 영조의 무덤을 만들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성왕후의 옆자리는 이 시간에도 비어있다. 살아서도 혼자, 죽어서도 혼자인 정성왕후를 후세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여기겠지만 혹자는 죽어서라도 남편에게서 벗어나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