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모가 사약 받고 죽은 사실 알고 복수 혈전… 240여 명 살해
조선 역대 왕 중 최초 탄핵… 강화도에 유배돼 질병으로 사망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혼군(昏君)이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말한다. 조선의 혼군은 연산군·광해군·선조·인조를 일컫는다. ‘인문학 여행’은 4회에 걸쳐 이들 4명의 임금을 차례로 소개한다. 첫 번째로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1476∼1506년)이다.
연산군을 거론할 때 증조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1502년)에 대한 폐륜 행위를 빼놓을 수 없다.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 숙의 윤씨가 인수대비 때문에 죽은 것으로 판단했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成宗·조선 제9대 국왕·1457~1494년)의 어머니이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후궁 엄씨와 정씨 두 사람이 친모 죽임에 가담했다고 여겨 때려 죽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들이자 이복형제인 안양군(安陽君) 이항과 봉안군(鳳安君) 이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쳐들어갔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라면서 안양군에게 술잔을 올리게 했다. 인수대비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자 다시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라고 했다. 인수대비가 놀라면서 엉겁결에 베 두 필을 가져다줬다.
이때 연산군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며 머리로 인수대비를 들이받았다. 인수대비가 “흉악하구나”라고 말하곤 자리에 누웠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두 이복동생도 귀향 보내 사사했다. 이런 상황은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
인수대비는 왜 연산군의 어머니를 죽게 했을까. 숙의 윤씨는 적장자인 연산군을 낳자 득의만만해졌다. 남편 성종의 후궁들을 질투해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고, 급기야는 용안(龍顏)에 손찌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인수대비는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며, 이례적으로 문자를 잘 알아 책을 펴내기도 했다. ‘열녀전’·‘여교명감’·‘소학’ 등을 모아서 ‘내훈’(內訓)이라는, 여성을 위한 교양 지침서를 펴내기도 했다. 내훈은 “여성은 여성답게 살자, 여성은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런 인수대비의 눈에 윤씨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이 안됐다. 인수대비는 임금에게 윤씨의 폐출을 강하게 요구했고, 그에 따라 윤씨는 서인으로 강등돼 궁 밖으로 쫓겨났다. 시간이 좀 흘러 성종은 가혹했다고 생각했는지 내관을 보내 윤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때 내관은 인수대비의 명령을 받아 “폐비 윤씨가 반성도 하지 않고 얼굴에 화장까지 합니다”라고 성종에게 보고했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는 노해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했다.
내막을 알게 된 연산군은 어머니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문신 이세좌를 비롯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갑자사화 희생자는 240여 명이고, 그 중 사형당하거나 부관참시당한 사람이 120명에 달했다.
연산군이 혼군으로 꼽히는 배경에 처참한 가족사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왕권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이 본시 내 것인데 너희가 내 것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더냐. 이제 다시 내가 찾아오려 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씌어 있다.
◇반기 든 단 한 사람은 ‘환관’
연산군의 폭정과 사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살기 좋은 지역은 모두 사냥터로 삼아 금표를 지정해 백성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임진강 변에 화려한 별장을 짓고, 중국으로부터 사치품을 사들이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얼굴이 예쁜 처녀를 강제로 모집해 유희에 동원했다.
연산군 집권 하에서는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반기를 든 이가 문종 때부터 임금을 모셨던 환관 김처선(1421~1505년)이다. 김처선은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 앞에 나아가 “이 늙은 신은 4대 임금을 섬겨 대략 서사에는 통하나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라고 직언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연산군은 활을 쏴서 김처선을 죽여버리고 혀와 다리를 잘랐다. 또 김처선 부모의 무덤까지 헐어버리고, 김처선의 이름이 보기 싫다며 향후 ‘처’자를 쓰지 말라면서 24절기의 하나인 처서(處暑)라는 절기를 ‘조서’로, 처용무를 ‘풍두무’로 바꿔 부르게 했다. 혹자는 과거 시험에 ‘처’자를 썼다는 이유로 낙방되기도 했다.
연산군은 결국 1506년 9월 2일, 집권 10년 만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다. 박원종·성희안·유자광 등은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후에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1488~1544년)을 내세워 연산군을 탄핵했다. 이들이 반정을 꾀한 이유 중에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덕종의 아들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으로, 연산군에게 수모를 당했다. 성희안은 이조참판이었다가 연산군 때 9급 공무원인 부사용으로 좌천됐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유배됐다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서울 방학동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연산군에게도 특기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한편으로 느긋하게 시를 짓는 괴벽이 그것이다. 연산군 폐위 후 시집은 거의 불탔고 현재 120여 편 정도 남았다. 연산군의 시를 옮긴다.
“귀뚜라미는 찬 새벽에 울어 추위를 더하고/기러기는 맑은 밤에 울어 시름만 일으키누나/높은 대 위의 맑은 달빛이 가장 좋나니/내 몸이 달 속의 광한루에 있는 듯하네”.
